책을 예년만큼 재밌게 읽지 못합니다. 점점 더 호기심이 줄어드는 느낌이랄까요. 아무리 읽어도 예전만큼 흥미가 안 가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일시적인 권태로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쪽수가 줄어드는 게 초조할 만큼 재밌게 읽던 책들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읽어도 그만큼 제가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당치 않은 기대를 품고 있었던 거죠. 더 나은 사람,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손아귀를 뜨겁게 했어요. 예전엔 사람들 앞에 나선다거나 공개적으로 누군가의 질문을 받을 때 저도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독서에 집착했는지도 몰라요. 어느 자리에 앉든 무슨 얘기가 나오든 몇 마디 정도는 쉽게 보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었거든요. 어디 가서 내 지성을 자랑할 수 있다면 행복하리라 믿었습니다. 근데 요즘엔 모른다는 게 그렇게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지적 허영이 옅어진 건데 그게 독서를 향한 열망을 누그러뜨린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이들이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 적고 자신의 모름을 드러낼 때 이상한 존경을 품게 됩니다. 그만큼 무지를 인정하고 무구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제가 좋아하나 봐요. 그런 열린 상태가 어쩌면 교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말과 생각에 귀를 열고, 기꺼이 자신의 주관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작가이고 싶습니다.
오늘도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어요. 일이 고된 날은 특히 버티기 어렵습니다. 글을 쓸 땐 키보드를 두드리는 타격감으로 거침이 없어서 졸음이 깃들 틈이 없는데, 글을 읽을 땐 착 가라앉으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수를 하고 다시 책장을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책이 재밌지는 않지만, 책을 읽어내었다는 기분도 제겐 퍽 중요한 문제거든요. 내가 읽은 책이 한 달에 몇 권인지, 어떤 작가를 통과했는지 기록하는 게 제겐 큰 자양분이 됩니다. 가끔 양이 질을 보전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벗고 씻지도 않은 채 드러누웠습니다. 요즘 세간을 늘리기 시작했더니 집이 어지러워 보였습니다. 당근 마켓으로 사들인 무수한 물건들이 처치 곤란처럼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휴대폰에서 '당근 당근' 울릴 때마다 설레는 기분으로 물건을 살피고 있습니다. 값비싼 상품이 헐값으로 떨어지면, 전 얼른 톡을 보냅니다. 우리 집 작은 방에 들여놓은 운동기구도 그렇게 들여왔습니다. 마켓으로 통해 연락하고 옆 동네에 사는 판매자를 찾아갔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몇 개 상자에 꼼꼼하게 담은 거대한 기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판매자는 제가 혐오하는 민소매 티를 입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기구에 손을 얹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저도 이 기구를 사용하면 저들처럼 몸이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치 있는 구매처럼 느껴졌습니다. 전 작은 차에 물건을 어렵사리 다 싣고 토스로 오십만 원을 부치면서 삼만 원만 깎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단단한 근육만큼 다부진 성미로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팔뚝을 만들어준 이 아이를 헐값을 팔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작은 방에 고가의 운동기구를 설치했습니다. 두 청년의 땀과 고통을 상상하며 저도 홈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근력이 떨어지면 매사 힘에 부치니 늘 쇳덩이를 드는 운동을 합니다. 요즘 들어 부침도 있고 근육통도 가시질 않지만 그래도 운동은 제게 즐거운 취미입니다. 저는 운동보다 식욕을 억제하는 게 힘이 드는 타입입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야밤에 라면을 두 개씩 끓여 먹는다거나, 굽네치킨을 시키고 이건 튀김옷이 없으니 살이 찔 리 없다고 주문을 거는 일은 없습니다. 샤워를 하고 거울에 제 몸을 비추면 늘어난 군살을 보여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그럴 땐 가슴이 무너질 것처럼 아파서 다시 격하게 운동을 시작합니다. 전 똥배 나온 삶을 살 자신이 없습니다.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군살이 붙기도 할 테지만 최대한 부자연스럽게 유예하고 싶습니다. 먹는 걸 삶의 궁극으로 여기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커피만 연거푸 마시면서 공복이 내 팔자라고 주문을 외고 있습니다. 요즘은 그래서 저녁만 되면 동네 관목 숲 사이를 뛰어다닙니다. 땀복을 입고 열심히 트랙을 도는 어르신들을 사이에 서면 제 식욕마저 잠잠해지거든요. 나이키 러닝 앱을 켜고 십수만 원 하는 운동복을 입고 뛰다 보면 자기 관리에 능통한 근사한 현대인이 된 기분이 들어 좋습니다. 요즘은 러너스 하이보단 고요하고 느린 걸음을 더 즐깁니다. 침울한 음악을 들으면서 감성 철봉을 하고, 청량한 웃음을 짓는 동네 아이들을 내 자식인 것처럼 바라보며 괴로움을 잊으려고 합니다. 배드민턴 하나에도 까르르 거리는, 정말 까르르 소리가 나는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 잘 될 거라고 주문을 겁니다.
육체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노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저를 속였고 배신했던 그 사람이 이제 그다지 밉지 않습니다. 열띤 감정이 식어버려서인지 잊을 순 없다고 생각한 일도 잊고 삽니다. 늘 제 앞에서는 착해 보였던 그가 뒤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들었을 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이제는 전처럼 증오하고 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땐 저도 어렸지만, 그는 더 어렸으니까요. 한때는 제가 잘살아서 복수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복수 이상의 감정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렇게 글로 쓸 수 있을 만큼 태연자약해졌습니다. 시간이 감정을 누그러뜨렸고 이제는 길 가다 마주쳐도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당시에는 그에 관한 모든 기억에 힘겨웠지만, 요즘은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다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아련함에 젖기도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한때 좋아했던 친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사귀거나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몇 달 정도 어울려 지내며 속으로만 좋아했었던 아이입니다. 당시에는 아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우린 어렸는데 이제는 청년도 아니고 어른이라는 말밖에는 붙이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시엔 사귈 가망이 없어서 놔버렸었고,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근데 페이스북에 친구 추천이 뜨면서 그의 공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대단한 점은 연결고리가 다 끊어진 사람도 이어 붙여내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전 그와 제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해요. 번호도 없고 그 흔한 이메일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와 제가 가진 연결고리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실오라기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치밀한 IT 회사의 알고리즘이 그와 저를 이어냈으니 저로서는 기적을 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듬성듬성하던 기억을 이어 붙이며 친근한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화답해오는 친구에게 의례적인 칭찬의 말을 건네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가 SNS에 올린 사진을 하나씩 돌려보며 짐작이 가는 대로 말을 이어갔죠. 여전히 예뻤지만 얼굴에는 보기 좋게 나이 듦이 스며있었습니다. 눈 밑과 미간에 낀 주름이 시간의 더께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는 현재 종교단체에서 선교에 힘쓰는 모양입니다. 저랑 만나던 당시에도 힘든 일이 많아서 신앙에 의지했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제가 그에게 의지할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파서 전 당시에 화가 났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선교를 위해 방문한 여러 아프리카 사람들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평화롭고 아늑한 녀석의 눈웃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간 많이 편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였습니다. 한 교회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성경의 한 구절을 외는 사람들 틈에서 그도 천진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회 현안에 대해 남긴 한 토막의 문장도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전 녀석의 이력을 훑으며 나와 얼마나 멀어졌는지 실감했습니다. 저와 별반 다를 거 없는 일상을 보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그는 다른 존재였습니다. 고작 SNS에 올려진 게시물이지만 거의 십오 년 가깝게 연락 한 번 닿지 않았던 그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메신저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의례적인 인사를 덧붙이며 절대 일어나지 않을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그를 좋아했던 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도 저와는 마주칠 일 없는 곳에서 제 나름의 삶을 구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에 책상에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오래전 친구가 선교 동아리에서 갈등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선후배 관계에 주눅이 들어서는 매일 우는소리를 했더랬죠. 우린 당시 제가 살던 자취방에 술판을 벌이고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쉼 없이 떠들어댔습니다. 이 지겨운 학교생활은 대체 언제 끝나는가, 앞으로 뭘 해 먹고 산단 말인가 한탄하며 새벽을 견뎌냈습니다. 첫차가 다닐 무렵 술자리가 끝나면 전 그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준다는 구실로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틈나면 제 마음을 드러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봤지만 그럴 용기를 내진 못했습니다. 녀석의 비틀거리는 걸음과 처진 등을 기억합니다. 녀석은 제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방을 받아 들고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지요. 전 잠시 기다리다가 녀석의 방에 불이 켜지면 혹시 밖을 내다보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계속 뒤를 돌아보며 기숙사를 빠져나갔습니다. 고맙다는 문자라도 올 줄 알았지만 정말 싹수가 없는 녀석이었어요. 하긴 그때 녀석이 인기가 좀 많긴 했습니다. 제가 자처해서 맨날 뒤꽁무니를 따라다녀 놓고는 돌아가는 길에 야속함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면 픽 꺼지고 말 우리 사이를 가늠하며 비탈진 기숙사 골목을 되짚어갔었죠. 그때 비가 와서 그친 눅눅한 아스팔트 냄새와 멀리서 풍겨오는 풀숲의 기운을 생각하면 저는 그때 그 시절이 얼마나 내게 가혹했는지 생각합니다.
녀석은 이제 시간의 속박을 받지 않는 느긋한 지방 소도시에 사는가 봅니다. 탐탁지 않은 사교 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전에 없이 떳떳해 보입니다. 그는 제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면서, 자신은 아주 잘 지내니 만나서 차나 한잔하고 싶다는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그렇게 술을 좋아했는데 이제 술도 안 마시고, 몸 생각하느라 커피도 끊었다네요. 전 너무나 쉽게 그의 약속에 화답했고,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대화를 매조졌습니다. 그는 이제 제 기억 속의 그가 아니었고, 저도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됐으니 아쉬운 건 없었습니다. 조금 섭섭하고 애석한 마음이 비쭉거렸는데, 전 그걸 시간이 쌓여 이룬 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툭툭 털어버리면 그만인 감정이죠. 우리 어머니가 그러길, 옛 기억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노화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노화를 보이는 나와 시골에서 편안하게 사는 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느꼈습니다.
올해 여름에 세웠던 계획을 돌이켜봤습니다. 제가 한 일이 뭔지 정리해봤죠. 물론 계획에 턱없이 못 미쳤습니다. 계획이라는 건 매번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이니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이번 여름은 타격이 좀 컸습니다. 전과 다르게 살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한 약속을 어그러뜨리면서 제가 약한 존재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꿈꾸다가 소득 없이 다시 고스란히 이 자리입니다. 침대에서 눈을 떠보니 천장이 절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당신의 집 앞에 찾아가기도 하고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며 기행을 일삼았습니다. 시간을 그때로 다시 돌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전 바닥을 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걸 잘 견뎠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함을 느낍니다. 원인이 없는 일의 원인을 찾으려고 저 스스로를 닦달하던 시간에 참 많은 글을 썼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서 글을 쓰고 다시 눕는 밤의 연속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새로 시작한 삶에 안도했습니다. 전 지금으로선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는 것처럼 자그맣게 느껴집니다. 이제 당신과의 추억은 몇몇 육체의 냄새만이 짙게 감돌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 아무렇지 않다고 믿어버리니 점점 더 당신이 사그라듦을 느낍니다. 그리고 전 조금 더 나이 든 얼굴로 카페에 앉아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해보려고 피부과도 다니고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습니다.
이제 제게 남겨진 호사스러움은 시간과 글밖에 없습니다. 방에 흐르는 음악과 따듯한 목욕물, 은은하게 켜진 등불 밑에서 책을 읽는 게 낙입니다. 열심히 집을 꾸미고 사색에 잠기며 다른 살맛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시 돈은 이러려고 버나 봐요. 집에 들인 사치가 나답지 않아서 웃기지만 갈고닦은 취향 속에서 억지로라도 저 스스로 고양하고 있습니다.
요즘 자주 목표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라는 사람이 과정 안에 딱 던져진 느낌입니다. 안정된 직장을 찾아 혼자 잘살아 보자는 목표를 이루니, 일상을 튼튼하게 가꿀 수 있도록 취향을 갈고닦아 왔습니다. 책과 글을 가까이하면서 책을 써서 세상에 내놓았고, 요즘엔 더 나은 글을 쓰고 싶다는 즐거움 부담감을 갖고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목표를 이루면 제가 더 나아 보이고, 누구든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면 여자한테 인기도 많아지고, 커리어도 술술 잘 풀릴 줄 알았습니다. 근데 요즘엔 다음 거점이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점을 만들지 않고 사는 법을 늘 고민합니다. 목표는 이루고 나면 다시 허탈한 백지를 마주해야 합니다. 쓰는 그 사실이 곧 목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쓰고 또 쓰고 쓰는 게 희로애락을 다 가져가서 오직 쓰는 행위만 남은 삶이길 원합니다. 사실 요즘은 제가 벗어놓은 허물을 치우느라 급급한 상황입니다. 하루를 수습하기에도 빠듯합니다. 밤만 되면 지쳐서 넷플릭스를 보며 잠자리에 들고, 운동도 빼놓지 않고 하지만 자꾸 왜라는 질문을 떠올립니다. 바쁘디 바쁜 현대인은 다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삶에 의미 부여를 못하니 쉽게 지치곤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쓰는 과정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서두이자 전개이며 결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을 쓸 땐 즐거움을 다루기보단 고통을 쓰는 게 더 정직하다고 느낍니다. 맨날 죽는소리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사실 뭐든 좋으면 더 붙일 말이 없습니다. 즐겁거든 굳이 어렵사리 문장을 고민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저는 백지 위에 사후 약방문식으로 슬픔과 불안의 여파를 다루면서 슬픔을 해소합니다. 그래서 글이 이 모양으로 우중충해진 거죠. 가끔 글을 쓰다가 당신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봅니다. 요즘 당신을 보면 처음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보입니다. 그땐 왠지 모르게 더 순수하고 생각 없이 마냥 귀여운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좀 더 능숙한 어른처럼 보입니다. 그런 거리감은 정확하게 슬픔의 감정이라 저는 또다시 문장을 적어봅니다. 좀 더 세상 꼴에 맞춰 살아보려는 당신이 제가 짐작해온 당신과 무척 달라서 할 말이 많아졌거든요. 전 당신을 오해했고, 여전히 오해하지만 그래도 떨어지고 나서야 덜 오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섭섭하지만 누구에게나 성장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변화가 있는 법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