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
요즘엔 연락이 통 뜸했네요. 잘 지내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리듬을 유지하며 살고 있어요. 사는 건 전과 다를 게 없지만 좀 더 촘촘하게 사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온라인 모임을 주최해서 제가 고른 영화와 책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다 어둡고 침침한 책들이라 멤버들이 불만을 표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저를 믿고 따라와 줘서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다들 힘 나는 구석이 있는 작품을 보자고 성화인데 못 들은 척 더 가혹한 작품을 고르고 있어요. 지금 제 상태가 슬픔에 열려있다는 걸 느낍니다. 저도 밝고 풋풋한 이야기가 끌리는 시기가 곧 오겠죠. 기승전 '해피'의 구조를 지닌 로맨틱 코미디도 좋고, 무구한 소년의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도 마음 편히 응원할 수 있는 때를 기대합니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슬픔을 얘기할 때 더 편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언젠가부터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얘기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생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깝고, 고통이야말로 누군가의 영혼을 살필 수 있는 통로로 여긴달까요. 제가 어렵사리 택한 영화와 책에는 녹록지 않은 기운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멈춰 서서 우두커니 곱씹어야만 소화가 되는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살면서 겪는 모욕과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피는 이야기에 손이 갑니다. 이리저리 내쳐지는 과정에서도 살 구멍을 찾아내는 강인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저도 기운을 내요.
어디 가서 선뜻 말하기 버겁고 무작정 솔직해지기 어려운 작품을 모임에서 읽는 걸 좋아해요. 모임에 참가해야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뿌듯합니다. 어디서도 나누기 힘든 얘기를 해야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사는데 작게나마 보탬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합니다. 제가 모르는 세상의 질서와 오직 추상으로만 여겨지는 삶의 감각을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잘 잡히지 않는 말을 나누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꺼이 들어주고, 잘 이해가 안 가도 어떻게든 실체에 다가서는 과정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임입니다. 물론 끝나고 마시는 술 한잔,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 곁들이는 연애담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죠.
저를 믿고 모임을 신청해줬고 제가 고른 책을 샀으며 제가 직접 만든 발제문으로 얘기를 나누며 멤버들과 어느 정도의 신뢰를 쌓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외롭고 우울하고 처연하면서 화룡점정으로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그런 작품들이지만 기꺼이 저녁 시간을 투자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힘이 솟습니다. 다들 어느 정도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모임이 끝나고는 용기 내서 고맙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만두지 않고 계속 같이해준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고. 고마움은 표현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미루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최근에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읽고 믿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질문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관념에 맞서 팽팽한 의견 대립도 마다하지 않는 태도를 좋아합니다. 쉬운 답은 거짓과 과장에 가까울 때가 많고, 진실은 늘 울타리 밖에서 출몰하니까요. 그리고 모임이 끝났을 때 내면에 자그마한 일렁임이라도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런 높은 기대치를 쉽게 충족할 리 없겠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건 세상을 사는 태도에 관한 문제이니까요. 너무 진지하게 말한 것 같은데 모임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밝고 유머러스합니다. 때론 독서에 관한 얘기보다는 신변잡기에 더 치중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건 예술이 지닌 윤리입니다. 모임에서 자주 나오는 고민거리 중에 하나죠. 고루한 말이지만 무책임하게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해지는 꼴을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폭력과 섹스를 표현할 때 연출 방식이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엄지를 추켜올릴 순 없겠더라고요. 폭력적이며 적나라하고 타락한 인물에 연출자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여깁니다. 과거와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영화가 윤리적이라는 말을 잊고 오직 그 표현의 활달함 안에 그치면 거부감이 생긴 달까요. 어떤 작품을 예로 들고 싶지만, 너무 쉬운 판단을 요하는 것 같아서 그칩니다. 다만, 영화와 소설을 즐기는 모든 분이 이해할만한 고민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화면을 늘어놓고 뭔가 문제를 제기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그 자극에 놀아나는 영화가 참 많습니다. 저로서는 어떤 예술이든 관람자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민하지 않는 작품은 피하고 싶은 겁니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으로 불렸던 몇몇 예술가를 이제 더는 보지 않습니다.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지만 당위를 살피지 않고 그냥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넘겨짚는 작품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요샛말로 킬링타임용으로 소비되긴 싫은가 봐요.
최근 몇몇 미술관을 들렀습니다. 눈에 띄는 전시가 열리면 곧잘 가는 편입니다. 다행히 집 근처에 미술관과 갤러리가 꽤 있어서 이번 주에는 '매그넘 인 파리'라는 사진전을 다녀왔습니다. 유명 화가의 작품을 공수한 전시라면 교양 삼아서라도 찾아가는 편입니다. 최근 당신이 몇몇 갤러리를 소개해줘서 이제는 지도 앱을 보고 찾아가기도 합니다. 내가 살 수 있는 저렴한 작품을 살피거나, 작가의 이력을 보면서 넘겨짚는 재미도 생겼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지도 몰랐던 이름난 갤러리에 가본 경험이 제게 큰 자극이 되었나 봅니다. 현대 미술 최전방에서 생계로 미술을 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예술이 삶에 깃드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보면서 종종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작품을 즐기고 있는 게 맞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갤러리에 온 저 자신이 좋은 건지, 이 작품이 자아내는 심오한 무언가가 좋은 건지 헷갈렸습니다. 예술을 접하는 통로를 분주히 오가지만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두려움 없이 다가서고 있어요. 호기심을 억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예술을 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작가 존 버거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처럼 유명한 미술책도 찾아봤습니다. 미술로 가는 우회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미술을 무작정 신비화해서 삶과 유리시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통념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책을 찾는 셈입니다. 지적 허영의 발로지만 현대 미술은 유독 알아야만 보이는 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어쩐지 그림마저도 글로 배우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은 맥락이 보이니까 당최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작품도 가닿는 느낌이 들어서 자꾸 읽게 됩니다. 전 미술관에 가서도 팸플릿을 꼼꼼하게 다 읽고 그림에 붙은 작품 설명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봐요. 부작용이라면 정작 미술을 볼 땐 누군가의 해석에 작품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말만 남아서 작품이 주는 신비로운 기운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지죠. 그래도 말이라도 남는 게 어디예요. 화폭이 자아내는 느낌과 감각을 즐기려면 제겐 지식이 주는 허영이 꼭 필요한가 봐요. 순수하게 모르는 상태로 깨끗하게 그 느낌만 받아들일 순 없을까 고민하지만 그게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그래서 재밌는 거겠죠.
전 추상보다는 구상 회화를 더 좋아합니다. 풍경을 그린 것보다는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한 작품이 더 좋고요. 인물보다는 차분한 정물화에 마음이 가는 걸 느낍니다. 요즘도 주말에 미술관에 들러서 가리지 않고 작품을 관람해요. 그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도 구글로 작품을 검색해서 보기도 해요. 아스라하게 흩어지는 순간을 붙잡아놓은 세잔의 정물화를 유독 더 자주 봅니다.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뚫어지라 들여다봐요. 그의 작품에는 단정하고 깨끗한 시각적 쾌감이 있거든요.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은 여러 번 들춰보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엔 여러 정물이 놓여있고 그사이엔 어떤 질서가 균형감을 갖추고 있죠. 처음 봤을 땐 심상했지만 자꾸 보면 볼수록 그 장력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세잔은 정물의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하고 다듬어서 흐트러뜨리지 않는 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자연스럽지만 그게 그 자체로 자연스러울 수 없다는 걸 느끼는 과정이죠. 그림 속에는 완벽함이 주는 인공성이 있고, 자연스러움마저 만들어낼 수 있는 대가를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세잔은 작품 하나를 그려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관계 사이의 화음을 포착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의 그림 속에는 여전히 언어로는 도달 불가능한 질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사실 이런 말들도 세잔이 지닌 미묘한 조화를 꾸며내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시시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세잔은 평생 자신이 예리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자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탁자에 사과를 놓고 하염없이 들여다보면서 감각을 날카롭게 다지려고 노력했죠. 예술가는 첫째도 둘째도 관찰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잘 보며 살고 싶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내가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좋아하는 건 세잔의 명성 때문이 아닐까. 세잔이라는 이름값이 없었다면 그냥 밋밋하고 재미없는 그림으로 치부하진 않았을까. 아마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전 당신도 알다시피 허영에 깊이 빠져 사는 사람이잖아요. 서구사회가 구축한 바벨탑 아래서 이름난 작품이라고 레떼르가 붙으면 한없이 우러러보는 게 바로 접니다. 지금 히치콕이나 누벨바그 영화를 보면 사실 따분하지만 하도 대단하다고들 하니까 기를 쓰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허영의 발로입니다. 그건 어쩌면 예술이 세월을 버텨낸 노고를 경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견뎌낸 작품을 향해 절을 하는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전 이런 계속되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미술책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거나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결국, 저는 아는 것만 보이는 건지 반대로 몰라야 순수한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건지 여전히 그 답을 찾는 중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예술에서만큼은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시각을 갖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며 예술을 즐기고 있나요. 당신의 답장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