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Dec 03. 2016

문학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슬로우 웨스트 Slow West, 2015

어릴 적 삼국지 게임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아무도 없는 집 컴컴한 거실에서 밤늦게까지 클릭질을 하며 대륙 통일을 위해 분투했다. 일본 게임회사 KOEI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 시리즈는 반 아이들의 거의 다 통달하고 있어 아침에 학교로 출근해서는 떠들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하면 처자기 일쑤. 쉬는 시간이 되면 틈날 때마다 뒷자리에서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다. 호걸의 호탕함과 권력의 참맛을 아는 이문열식 삼국지는 그 어떤 시리즈보다 인기가 많았다. 그 노란색 10권의 책이 교실 이곳저곳 떠돌았다. 조자룡이 아두를 앞섶에 감춰 넣고 전장을 헤매는 모습이나, 장비가 혈혈단신 장판교 앞에서 수많은 조조의 군사들을 해치우는 모습을 즐겼다. 그렇게 밤낮 가릴 것 없이 삼국지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그중에서도 적벽대전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하이라이트라 부를 수 있는 대목이다. 제갈량의 묘수와 주유의 어리석음, 황개의 노장 투혼과 혼비백산 도망치는 조조의 처량함도 기억한다.

이문열 삼국지 세트(전 10권)

삼국지의 재미는 쉽게 수만의 군사를 파견해 몰살시키고, 쉴 새 없이 전장의 장수들은 참수해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전쟁의 재미다. 소설로 그 웅장함을 보고, 게임으로 내가 그 군사의 수치를 보유했을 때 쾌감이 있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서인지 그 처참한 살생에도 숫자의 개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영웅호걸의 목숨은 금쪽같은데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개죽음을 면치 못하낟. 어차피 콩알보다 작은 수치들이 사그라지는 형상일 뿐이다. 대의를 위해 그 무엇 하나 아까울 게 없다.


얼마 전 국문학자이자 역사연구가인 이정원 선생의 <전을 범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한국 고전문학을 재해석해 풀어놓은 책이었다. 그중에는 <적벽가>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적벽가'가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을 말하는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또한 책을 다 읽고 나면 '적벽가'에는 '적벽대전' 외에 '도원의 결의'라든지 '삼고초려'처럼 삼국지 독자들에 친숙한 에피소드도 첨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띄는 점은 '삼국지연의'에는 전혀 언급된 바 없는 '적벽대전'을 전후로 한 '위나라' 군사들의 설움, 죽음의 광경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을 범하다, 이정원 저

이른바 ‘군사 설움 타령’이라고 불리는 이 대목은 조조가 60만 대군을 적벽에 모아 전쟁을 준비하던 시점을 그리고 있다. 전쟁터에 나온 위의 군사들은 술을 퍼 마시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마치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과 <황산벌>과 같은 사극 영화에서 병사 개개인의 설움을 전장의 틈바구니에서 타령조로 표현했던 것과 같은 대목들이다. 명령에 죽고 사는 이들에게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노래뿐이다. 숱한 전쟁의 도구이자 이념의 희생양으로 사는 이들은 삶에 지치고, 처자식을 버리고 온 가장으로서의 무력감에 울분을 토한다. 적벽가는 이 대목에서 비장미를 더하지만, 끝내 유쾌한 분위기를 모르 척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군인이니 실로 당연한 것이라 하겠지만, 어쩐지 그 애쓴 유쾌함이 더없이 슬픈 기운을 준다. 조조, 제갈량 등 전쟁영웅들은 아랑곳없이 스스로 개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그들의 먹고사니즘이 재밌다. 병사들에게 국가적 대의와 시대 통일의 사명 같은 건 안중에 없다. 부인과 살 비비고, 자식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은 꿈은 소박하다. 학살에 가까운 불질과 뼈가 바스러지는 전장의 추위로 그들의 목숨은 이슬처럼 증발해버린다. 그런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개죽음은 전장에서 매일 벌어진다.


최근 본 영화 <슬로우 웨스트>에는 서부극답지 않은 미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서부개척시대의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는 숲에서 미국 원주민을 사냥하는 북부군으로부터 16살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맥피)를 구해준다. 제이는 아버지와 함께 서부로 떠난 여자 친구 로즈(카렌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부터 미 중서부인 콜로라도까지 머나먼 길을 혼자 찾아가던 중이다. 사일러스는 제이에게 돈을 좀 주면 여자 친구에게 무사히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사실은 로즈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고, 사일러스는 현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제이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이 두 남자는 음산한 미국의 숲과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대지 위를 비틀거리며 천천히 걸어간다.

슬로우 웨스트Slow West, 2015

미국에서 서부극은 일종의 영웅 설화로 기억된다. 역사가 짧은 근본 없는 미국 문명의 개척을 위해 서부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총잡이들이 신화다. 그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악한 토착민들을 죽인다. 최근엔 그걸 마블코믹스가 이어받아 슈퍼히어로 무비로 치환해 우주 침공을 막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래부터 우리가 주인이고, 우리가 제일 세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덤빌 자 없다. 하지만 <슬로우 웨스트>에는 그런 영웅이 없다. 스코틀랜드에서 이 서부까지 첫사랑을 찾아온 철없는 소년이 주인공이고, 그와 동행하는 사일러스라는 녀석은 한심한 하루살이 총잡이일 뿐이다. 이들은 서부극처럼 맹목적으로 서쪽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다. 제이는 말한다 사랑을 찾아 이 사막으로 왔노라. 시와 별 헤는 밤이 노래가 밤하늘에 쏟아진다. 하지만 소년의 뜻과 다르게 이 짧고 느린 여행에도 이러저러한 인간들이 죽어나간다. 겁에 질려, 돈을 벌려,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사랑을 구하는 로미오에게 낭만 이외의 피폐한 삶은 그 어떤 의미가 없다. 제이는 문학을 동경하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비극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다. 그러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낭만적 기류가 흐를 수밖에.

슬로우 웨스트Slow West, 2015

서부극이 표방하는 영웅의 특징은 해당 지역 원주민을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총질에 의해 살해당할 뿐이다. 그 속도와 맹목 의식은 오로지 저변을 확대하는 미국인들의 추진력을 자극하게 됐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지배욕을 주체하지 못해 죄 없는 이들은 죽음으로 몰고 간 몰지각함을 각생하게 한다. 미국이 베트남과 이라크에 했던 것처럼 말이다. 서부엔 살육을 위한 영웅은 있지만, 그로 인해 희생되는 원주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다. 하지만 <슬로우 웨스트>에는 느린 템포에 맞게 개척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의 시체를 바라본다. 죄 없는 소년마저도 겁에 질린 한 여자를 쏴야만 하는 시행착오도 있지만, 소년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첫사랑 로즈를 구해내고, 그녀의 사랑마저 그 누군가에게 양보하며 영웅적 죽음을 택한다. 슬로우 웨스트의 엔딩에서 제이는 자신이 품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서부를 향한 맹목적 돌진으로 흩어져버린 사람들을 모른척하지 않겠다는 것. 그 어떤 이유든지 간에 개개인의 삶은 존중되어 마땅하다는 것. 소년 제이는 이 야만의 세계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사람이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스쳐 지나왔던 시체들을 떠올린다. 관객은 몽타주로 각인되는 숲의 정경들을 디시 한 번 마주할 수 있다. 실로 존엄을 지닌 이별이 아닐 수 없다.

슬로우 웨스트Slow West, 2015

우리가 영화관에서 재난영화를 보며 점으로 수렴하는 수많은 희생자들에 손뼉 치고, 정해진 수치로 정형화된 무고한 악당들의 죽음을 보며 감탄하는 이유는 국가와 집단이 이익이 곧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문학에서 조직과 집단은 사이를 좁힐 수 없는 앙숙지간이다. 난 그 흔한 죽음들 속에도 아침의 공명과 햇살의 따스함에 몸을 맡겼던 한 인간을 기리는 문학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요즘 개봉하는 신작 영화는 불과 3일 만에 자신의 존명을 결정당한다. 그렇지만 문학은 수세기를 걸쳐 흘러 내려온다. 그 누구에게 무언가를 남기면서 이야기성은 변치 않는다. <슬로우 웨스트>에서 소년은 결국 사랑하는 로즈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제이의 총을 쥔 체 그녀를 멸하려는 인간을 쏴 죽임으로써 이 비극은 장중하게 마무리된다. 그리고 로즈가 커피를 끓이고, 사일러스가 망치를 들고 그림을 걸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서부극의 엔딩은 또 다른 서부를 향한 개척이 아닌, 이제 정착하여 집을 일구고 한 가정의 삶에 충족하는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근사한 엔딩이다. 삶은 유려한 폐곡선 안에서 제 할 바를 다하며 굴러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작가의 이전글 운전대를 위한 잡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