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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4. 2016

속된 세상의 껍데기

언더 더 스킨, Under The Skin 2013

우주, 그 넓은 삼라森羅 역시 먹고살기 힘들 것이다. 우주의 생태계도 유한할지니 어찌 지구 약탈을 꿈꾸지 않을까. 먹방이나 찍으며 음식을 축내는 인간들을 노리는 외계인은 납득 가능한 상상이다. 어쩌면 외계인도 지구에 잠입하여 눈먼 소를 도축하듯 인간을 잡아들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적 상상력의 시작은 소박하지만, 이런 상상이 걸작의 탄생을 촉발한다. 우주란 서사를 직조하는 이에겐 손 끝에 힘을 주는 잔상일 테고, 이미지를 그리는 화가에겐 어쩌면 모든 것을 잠식하는 영감의 캔버스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언더 더 스킨>이라는 서사의 이미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도축되길 기다리는 피칠갑의 인간들이다.


그녀는 이제 막 지구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녀는 인간을 도축해 우주의 행성으로 납품하는 회사에서 인간 고기를 도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 주변에서 회사에 의해 고용된 감시자가 있다. 고급진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그녀의 행태를 감시하는 이 남자는 고용주의 끄나풀이 분명하다. 그녀의 선배 격인 한 여성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이 남자를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있다. 늘 긴장된 표정으로 이 시골 마을의 남자들을 사냥한다. 납품의 임무를 가진 그녀에게 더 섬뜩한 사실은 죽은 인간 여성의 껍데기를 입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출이 많고, 몸매를 드러낼 수 있으면 그뿐이라고 말하는 듯 조악한 옷가지들을 불쾌한 기분으로 주어 입었다. 하지만 못내 못마땅한 마음에 그녀는 곧바로 백화점에 가서 더 야한 옷과 더 자극적인 화장을 하고 나타난다.


그녀는 현명한 노동자다. 그녀의 일하는 방식은 영화를 10분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리의 남자들을 유인해 행성으로 납품하면 그뿐이다. 도축과정부터 유통까지 자동화가 되어 있어 그녀로서는 사냥만 잘해주면 보너스를 든든히 챙겨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그녀의 전임자는 왜 죽임을 당한 걸까. 죽음 당시 자신을 바라보는 슬픈 눈과 그 옆을 지키던 개미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는 끝내 몇 가지 머릿속에 남는 질문들을 널어놓고는 이내 무시해 버린다. 이런 방치 수준의 각색이 영화적으로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주의 탄생을 보는 것만 같은 원형의 이미지로 영화는 시작한다. <언더 더 스킨>이라는 제목의 영화답게 껍데기 너머 그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암시로 시작하려는 걸까.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면 이 몽롱한 오프닝의 귀착점은 어느 한 여성의 눈동자일 뿐이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앞둔 그녀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만져지지 않는다. 영원한 세상 그리고 무한한 자유를 상징하는 우주에 대한 선입관을 노동자의 메마른 눈동자로 치환하는 불편한 서사를 마주한다. 이 눈동자의 주인공이자 외계인이기도 한 이 영화의 주연 배우는 육체적으로 압도적인 스칼렛 요한슨이다. 어쩌면 이 무미건조한 영화가 마지막 한 컷까지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육체가 주는 매혹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궁금증은 모른 척하고, 낡은 밴을 운전하며 사냥에 몰입한다. 옷과 화장 그리고 속옷에까지 신경을 쓴 만큼 독신 남성이 제격이다. 섹시한 여성을 바라보는 독신 남성은 내 집 거실에서 뛰어다니는 강아지보다 더 쉬운 사냥감이다. 길을 물어보려는 듯 차에 태우고는 조금 칭찬해주고 호의를 보이면 순순히 넘어온다. 웃음 파는 직업이 다 그렇듯 그녀도 이 일이 달갑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냥이 끝나고 혼자 있는 시간이면 화장을 고치며 고독의 시간을 보낸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루 종일 근무시간에 자신의 몫을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할 뿐이다. 마치 신성한 노동을 다루는 듯 보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이 있다. 바로 덫에 걸린 발기된 남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이다. 마치 늪 속으로 빠져들 듯 평온한 표정으로 고깃덩어리가 되어가는 남자들은 늪 안에서 숙주에 의해 모든 체액을 흡수당한다. 유려한 걸음걸이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남성들은 넋을 잃고 그녀를 따라간다. 붉은색의 그녀의 입술, 육감적인 몸매에 잃을 것이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옷을 좀 벗어주고, 끝내주는 미소로 남자를 홀린다. 객석의 나도 홀리고, 내 옆자리 남자도 홀렸다. 결국 고깃덩어리를 제공한 남자들은 껍데기만 남는다. 빛 좋은 혈관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던 남자들이 껍데기만 남기고 소멸되는 장면은 압권이다.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괴한 분위기와 참신한 도축 신이 극장 안을 숨죽이게 한다. 늘 영화적 이미지에 매혹되어 영화를 찾지만, 막상 그것을 눈앞에 두고 보면 섬뜩한 맘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언더 더 스킨> 역시 마찬가지다. 더욱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아둔한 남자들이 내 모습과 겹쳐 보여 입을 벌리고 빠져들었다.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니면 큰 코 다친다는 계몽적인 메시지가 있는 걸까.


우중충한 날씨와 어두운 묵시록적 분위기에 대사가 거의 없고, 조금이라도 웃을라치면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영화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고려해 스코틀랜드의 거리를 집중적으로 찍은 것이 외계인이 가진 고독을 서술하는데 효과적인 기능을 한다. 극의 활기를 띠는 지점은 명확하다. 모든 게 짐작뿐인 지구에서 그녀는 점점 인간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하고, 인간과 성교를 하거나 TV를 보며 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진다. 뭐가 그녀를 어지럽힌 걸까. 무엇이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한 걸까. 왜 그녀는 낯선 남자와 동침하고 싶었던 걸까. 가족들이 가득한 카페에서 케이크를 주문해 먹다 헛구역질을 하고, 자신의 사타구니를 들여다보며 성기마저 텅 비어버린 것에 분개한다. 도대체 왜 그녀는 자신의 일을 등한시하게 된 걸까. 그 흔한 외계인의 지구 적응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녀의 전임자는 왜 죽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제기되는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직 관심이 가는 것은 그녀의 변화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의구심들을 다시금 복기하는 것뿐이다.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남성과 그 후 남겨진 아이의 울음소리. 몇몇 인간이 그녀에게 보여준 안온한 접촉들. 그녀는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반복하고, 더 이상 인간을 사냥할 구실을 찾지 못한다. 아무것도 짚이는 것이 없음에도 그녀를 변화하게 한 시골마을의 모습들을 복기해본다. 어떤 영화는 물음과 의문이 그 영화 전체가 되기도 한다. <언더 더 스킨>은 드러난 사실보다 숨긴 무언가가 핵심인 영화다.


이 조용하고 답 없고, 낯선 영화적 기법은 외계인이 이 세상을 접하는 느낌과 유사함을 가지도록 연출되었다. 우리가 늘 그저 그렇다고 봐왔던 밤의 거리와 한심한 인간들의 작태들이 이제 막 인간의 눈을 뜬 외계인에겐 신세계의 공기일 것이다. 조용한 우주 행성에 비하면 지구는 그야말로 세속의 끝이자 소돔과 고모라의 현대판이 아닐까. 텅 빈 산장에서 잠을 청하고, 인간의 유적지를 걸으며 그녀는 지구라는 행성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맘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새 전임자의 죽음도 잊어버리고 돌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영화는 지구의 악인에 의해 강간을 당하려다 화형을 당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결짓는다. 그녀가 수많은 남자들을 죽인 것처럼 그녀 역시 인간에게 처형당한다. 흰 눈밭에서 연기가 된 그녀는 신화 속의 성인처럼 재가 되어 날아간다. 텅 빈 하늘은 사라지는 그 모든 재가 하나의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듯 을씨년스럽다.

익숙한 영화적 컨벤션에서 벗어난 <언더 더 스킨>을 접했던 내 기분을 두서없이 글로 표현해봤다. 상상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창작물의 늘 그렇듯 이물감에 흥분을 지울 수 없다. 늘 그렇고 그렇다고 완전히 이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카메라는 낯선 형태로 대상화한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난 영화가 남긴 침묵의 시간과 의문점들을 스스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서사의 구멍에 대해 불평하기도 보다는 능동적으로 맞춰 넣었다. 상징과 은유로 모든 이야기를 포옹하고, 오로지 인상적인 이미지의 나열만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신선하다. 의도적 허술함과 지독히도 말이 없었던 그녀에게서 난 피부 아래의 존재를 마음껏 즐겼다. 그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늘 그렇듯 모든 껍데기 안에 진짜를 상상하는 과정이야말로 예술의 원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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