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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0. 2016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간들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 2015

내 나이가 올해 서른이니 내 친구들을 스필버그 세대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다. 1986년에 태어나 스필버그의 작품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아버지와 손잡고 시내 극장으로 보러 갔던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후크>가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반 정도를 완성해간 시점이었다. 내가 다섯 살 때의 일이니 난 후반기 스필버그의 창작물과 함께 20대를 보냈다. 그가 앞으로 몇 편의 작품을 더 연출할지 모르지만 그의 노년이 지금처럼 풍성하길 원하고 또 원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스필버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티>와 <인디아나 존스>, <죠스>, <미지와의 조우>는 사실 한참 지나서 주말의 명화를 통해 접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중 가장 재밌게 본 게 무어냐 묻는다면, 내 친구들은 90년대 후반 작품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말하곤 한다. 나처럼 영화 좀 본다고 으스대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쉰들러 리스트>나 <마이너리티 리포트>, <AI>를 말할 테고. 나 역시 그의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게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홍상수 감독이 <해변의 여인>을 통해 세계관이 조금씩 변해버렸듯(내 기준에서) 스필버그 역시 동화적 세계관에서 이 작품을 기점으로 좀 더 습하고 어두운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함을 느꼈다.

스티븐 스필버그, 출저 : 스필버그 페이스 북

내게 스필버그를 향한 반감도 있다. 그건 일종의 완벽에 대한 거부감이다. 완성도가 100에 가까워지면 빈틈을 찾기 어려워진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자신의 세계관에서 한 치의 더듬거림도 용납지 않는다. 프로덕션 과정부터 자본과 대중성, 평론가들이 놓칠 수 없는 기술적 발전까지 꽉꽉 들어찬 광경이 내겐 버겁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막상 영화관을 나오면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 영화 진짜 대단하다며 극찬을 하지만, 블로그에 끄적일 생각일랑 들지 않는 것이다. 영화가 대상화되는 이런 현상은 걸작 조각품을 미술관에서 볼 때의 거리감과 다르지 않다. 내 것은 아닌 마음이 드는 것이다.

회사 사람들과 노래방에 가면 진짜 형편없이 부르는데도 탬버린을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가령,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며 아마추어답지 않게 간드러진 동료의 노래는 이상하게 듣기 싫어질 때가 많다. 그건 질투가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이 노래실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밉상은 아무리 유능해도 재수가 없고, 틈이 있는 사람도 허허실실 정이 가는 녀석이라면 응원하게 된다. 삑사리도 내고, 가끔은 음정이 틀려 허둥대는 사람에겐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법이니까. 스필버그의 영화는 한 마디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무결한 세상이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이웃집의 엄친아를 대하는 마음이다. 심지어 그가 모든 아이들을 사로잡았다는 <이티>의 감동적인 엔딩을 보면서도, 어린 나는 잘 계산된 연출의 기민함에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수식과 공식에 의해 재단된 감동이랄까. 그래서 내가 그의 필모를 쭉 돌아보며 짚어냈던 건 가령 이런 것들이다. 아 이건 여름 블록버스터군, 아 이건 영화제용이네 그래 봤자 못 받을 텐데. 아 이건 비수기용 소품이구나. 가장 앞장서서 그의 작품을 즐기고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불만이 많다.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 2015

스필버그와 비슷한 경우가 서태지의 음악이다. 문화대통령이라 칭해지며 시대적 사명과 늘 같이했던 서태지는 창작의 고통을 호소하며 96년 은퇴했다. 물론 번복하고 엄청난 규모의 음반사와의 계약과 TV 출연 조건으로 화려하게 컴백했지만, 과거의 혁신적인 몸짓을 재현하진 못하고 있다. 서태지는 사생활을 통제하고, 음악에 사회적 명제들을 끼워 넣으며 신화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토록 열광했던 그의 음악을 산책 중엔 즐기지 못한다. 왠지 두 눈 부릅뜨고 경건한 자세로 들어야만 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어디 여의도 공원에서 서태지의 음악이 어울리느냐 이 말이다. 똥 누다가 서태지의 시대유감을 듣는 게 가당키나 하나. 이는 완전무결한 것을 삶에 녹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필버그의 영화와 비슷한 감정이 된다.

플롯과 내러티브의 조화, 빈틈없는 신과 신의 결합은 경이롭지만, 그가 자본으로 구축한 거대 시스템의 산란은 빈틈없는 세공에 감정마저 통제된 지점에서 작동하도록 매뉴얼화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 블로그에 적는 거지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간이 흘러가고 스필버그도 황혼기에 다다랐다. 그의 후반기 영화들엔 이전같은 기개란 사라졌다. 스필버그는 영화에서마저 마지못한 표정으로 주저하고 회한에 젖어있다. 세상을 온전히 낙관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망설인다. 그가 유대인 학살을 다루고, 인종 차별을 다뤄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적 템포에 쉼표를 찍고, 도돌이표를 적어 넣는 순간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회한에 젖어 술을 마시고, 걷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에 놀라기도 하는 건 스필버그에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지속적 연출에 의한 피로감과 개인적 사연들이 놓쳐버린 것들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 연출 속도가 더뎌지고, 간만의 개봉작도 이제 흥행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 개봉작 <스파이 브릿지>는 스필버그의 영화 중 과거와 회한, 별 수 없는 미래를 낙담하는 근심의 영화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 존엄의 감동을 다룬 실화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가는 순간엔 깊은 한숨을 동반하는 꺼진 감정이 피어오른다.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 2015
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1957년을 배경으로 제임스 도노반이라는 변호사는 곤란한 사건을 맡게 된다.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라는 소련 스파이의 변호사가 되어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근심하던 제임스는 법의 공정함을 보여주기 좋은 기회라 여기고 사건에 몰입한다. 정부는 형식적인 역할로서의 변호사를 기대했지만, 원칙주의자인 제임스는 빈틈없이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스파이를 변호한다고 여론과 대중에 아유를 받지만, 그는 법과 양심에 따라 이 풀리지 않는 명제를 해결해나간다. 한편 같은 시기 CIA 첩보기 조종사가 소련에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양측이 포로교환에 동의할 거라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제임스를 협상자로 내보낸다. 서독과 동독이 이제 막 분단의 벽을 쌓아 올리려는 베를린에서 제임스는 하나를 위한 전체의 희생을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스파이가 나오고, 소련과 독일과 이념전쟁 등이 영화 안에 가득 차서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된다.(마치 존 르카레의 에스피오나지를 읽는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 영화의 시작부터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남자가 등장한다. 루돌프 아벨이라는 이름의 이 아마추어 화가다. 그는 간첩 혐의로 미국 정보국에 체포된다. 남루한 방, 굳어 부서져버린 물감, 악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화법의 노인. 그는 전적으로 미국에 체화된 인물이지만, 온전히 발을 걸치지 못하고 절름거리며 삶을 사는 낡은 스파이다. 그의 역사와 고국의 상황 등이 굳이 나열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짐짓 멈칫거리게 된다. 작품의 일률적인 해석을 방해하고, 여지를 남기며 근심 어린 눈빛으로 엉킨 마음을 풀지 못한다. 이 더듬거림이야말로 <스파이 브릿지>가 녹록지 않은,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와는 다른 지점이라고 판단되는 지점이다.

<스파이 브릿지>에선 유독 인물들이 가만히 생각을 하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빠른 전개와 쉴 틈 없는 정보량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막간의 틈을 내어 영화의 두 노인은 갈등한다. 변호사와 스파이 혐의를 가진 노인. 숨을 고르고 매 순간에 펼쳐진 광경을 떠올리며 놓친 건 없는지 되돌아본다. 이 장면을 곁에서 촬영하며 고심할 스필버그도 낸 눈에 아른거린다. 장면을 하나씩 정밀하게 음미하고, 작품 전체와 길게 호흡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연출자와 심지어 연기하는 톰 행크스의 시선까지 의식하게 된다. 나와 오랜 시절 같이 보냈던 이 영화적 동지들과 같이 하는 즐거움이 마치 벤치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정겹게 들렸다. <스파이 브릿지>는 물론 그의 영화 중에 가장 재밌는 영화는 아니다. 세공하는 솜씨 역시 날카롭지 못하다. 하지만 뭉뚝한 이 템포가 참 좋더라. 어두운 세상을 굳이 감동의 지점으로 이끌지 않아도 그저 응시하는 자의 한숨을 보며 안도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흘러가고 어리석고 그릇되고 있다. 한 인간의 존엄을 위해 뛰어본 들 결국 뒷자리에 태워진 그의 목숨까지 구할 순 없으리라. 그것이 지금 눈앞의 세상 이리라.

출처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 2015

영화란 보는 연령에 따라 혹은 읽는 그 자리에 따라 그 감상이 미묘하게 변하고 오르내리며 기억을 혼동하게 하기 마련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든 마틴 스콜세지든 장 뤽 고다르든 브라이언 드 팔마든, 데이빗 핀처든 제이슨 라이트먼이든 영화에 대한 내 감상은 그때그때 변곡점을 이루며 흔들리게 되어있다. 다시 보며 생각보다 별로네 하며 입맛을 다시는가 하면, 새삼 아 그땐 내가 미처 알지 못했구나 하며 탄복하며 볼 때도 있다. 그래서 스필버그의 작품들도 가끔 케이블 티브이를 통해 보고 있으면 어 저거 별로였는데, 지금 보니 이럴 수가 있나 할 때가 있다. 최근에 케이블 TV를 통해 우연히 본 <우주 전쟁>이 당신엔 형편없었지만, 이제와 아 아늑하다며 넋을 넣고 본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엔 꽤 유치해서 이런 동화 같은 영화는 안 보겠다고 했던 작품이 지금은 심금을 울려 가슴을 부여잡기도 한다. 시기와 경계를 가진 스필버그의 두 세계가 밝기에 따라 나뉜다면, 영화를 보는 나의 세계관 역시 그의 영화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각기 다른 기준을 만들어낸다. <스파이 브릿지>는 서른이 된 내게 스필버그가 보내준 근심 어린 편지다. 주저함과 망설임이 일종의 미덕처럼 아스라히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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