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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1. 2016

'쓸데없음'에서 노니는 작가들

소설가 '이기호', 영화감독 '장진' 그리고 영화감독 '케빈 스미스'

1. 이기호,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쉽게 술술 읽히는 소설이라는 몇몇 지인의 추천에 구해 읽게 된 책이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다. 옆에 초콜릿 좀 까놓고, 커피 끓여다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서 읽기 시작했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기대와 다르게 더딘 발걸음이 지속되었다. 우선 소재들은 독특하다. 국기게양대에 올라가서 세상사는 하는 인간들도 있고, 전 세계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혼자 산에서 책이나 쓰는 어쭙잖은 놈도 있다.

교보문고와 연결되는 광화문역을 가득 매운 질곡을 곡괭이질 하는 건 약과고, 흙으로 만든 볶음 레시피까지 등장하고 나면 피곤해져 커피 한 모금하고 한 숨 내쉰다. 작품 간 편차가 있지만 소설가 박경리 작가의 집을 보며 어린시절 추억을 풀어놓는 <원주 통신>과 학창 시절과 소설 쓰기의 절묘한 배치로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표제작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같은 작품은 바쁜 세상에서 혼자 딴 척하며 빈둥대는 느낌을 주는 재미가 있다. 다만 내게 부대꼈던 건 이기호 작가 특유의 건들거리듯 가벼운 문체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을 만큼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으로 손짓을 하는 게 아니라 계속 어깨를 손으로 짚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기지 않느냐며 재촉한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다. 이 가벼움에는 소재주의로 느껴지는 비현실적 설정과 사회적 의제들과 어우러져야 한다는 비틀기 식의 문체들이 계속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데 있다. 코믹과 풍자를 버무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소동으로 치닫게 되자 노곤해진다.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드나 쇼의 묘비명(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을 따온 이 책의 제목처럼 우물쭈물하는 이야기의 더딘 진행이 이야기성이라는 측면에서 즐길 수 없게 한다.


2. 영화감독 장진, 간첩 리철진

이 책을 읽으며 괜스레 장진 감독의 영화가 생각났다. 초기 <킬러들의 수다>, <간첩 리철진> 최근에 이르러서는 영 힘을 못 쓰는 <퀴즈왕>, <하이힐>, <굿모닝 프레지던트> 같은 작품들까지. 그의 영화는 '와 진짜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시놉과 예고편에 넣기 좋은 유머 코드가 잔뜩 묻어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를 보는 촉매가 되진 못한다. 게이 형사, 간첩, 킬러, 불치병 걸린 야구선수, 남과 북에서 상봉한 형제와 방송국 퀴스쇼에 몰린 각양각색의 수다꾼들의 난장까지 소재들이 다양하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나면 피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극의 리듬이 튀고, 늘 순간의 재기에 의지하다 보니 서사의 균형추는 흔들린다. 철 지난 휴먼 코미디를 남발하고, 늘 설교 형태의 얘기로 시간을 때우다 보니 '엥 이게 100분 토론을 하려고 하네', '꼰대가 다 됐네' 하는 반응까지 나오는 것이다. 갑자기 이기호 작가 얘기를 하다가 영화감독 장진의 영화를 끄집어낸 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세계관이 유사하다고 느껴져서다. 인물 간 대화의 활력과 황당한 사건사고를 즐기는 극작 방식이 묘하게 닮아있다. 처음 읽을 땐 흥미롭다가 몇 편 지속되면 꽤나 지쳐버린다는 점도 마찬가지. 

간첩 리철진 The Spy, 1999

장진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간첩 리철진>을 안양 평촌의 백화점 내 소극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슈퍼돼지 복제 세포를 훔치는 목표를 완수한 리철진은 그걸 들고 북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남측 공작원 가족들과 이별을 한다. 아쉬움 속에서도 간첩답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리철진과 그걸 지켜보지 못하고 계속 웃기려 드는 장진의 연출이 잘 버무려진 장면이었다. 어색한 공기와 그에 이어지는 전방 철책선 인근의 황량한 풍경, 북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시큰하게 했다. 영화를 막 재밌게 보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라 유독 생생하다. 더디고 주춤거리는 시선의 고단함 같은 것들이 살아있는 문학적인 순간이랄까. 내가 최근 장진 감독의 행보를 유독 애타게 바라보는 이유다.


3. 따분한 결혼식과 분리된 주말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난 짜증이 나 있다. 주말이 휙 가버렸기에 우울함이 앞선다. 피자를 시키고, 새벽까지 엘 클라시코를 즐겼으나 레알은 졌으며, 피자는 과식으로 변해 날 괴물로 만들었다. 주말이란 게 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주말 답지 못하다. 빈둥거리며 잡담이나 늘어놓던 대학시절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오늘 아침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결혼식에 다녀왔다. 대학시절 만났던 학우들을 여럿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나를 향해 있는 그대로 웃어주지 않는다. 그저 빨리 스쳐 지나가기 위한 허식의 웃음이다. 점점 더 결혼식 참석이 버거워지는 건 바로 그들을 보는 일이 유쾌하게 못한 데 있다. 그럴듯함을 강요하는 시선을 받는 결혼식과 서로의 소득 수준으로 엮어 묶이는 대화 소재의 고갈. 남들 다 하는 만큼만 하고, 평생 행복할 거라며 본인들도 믿지 않는 서약을 중얼거린다. 하지만 정작 웃긴 건 이 결혼식에 관심을 두는 이가 몇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사자도 고생이고, 참석한 녀석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연회장에서 몰 집어먹을까 생각만 한다. 아마 사진 찍는 인증식이 없었으면 벌써 도망가서 오늘 낸 액수만큼의 아까움을 토로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눈엔 과거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대학시절 동창들이 보였다. 선후배들 모두 직장인이 되어 연봉 얘기, 이직 얘기, 아파트 얘기, 주식 얘기에 여념이 없다. 세상 나랑 관계없는 얘기들에 지겨워진 나는 휴대폰만 끄적거리다 돌아왔다. 오는 길에 2시간이나 운전을 했다. '아 이제 결혼식은 그만 가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난 눈앞에 막히는 서울시내 혼잡한 교통체증을 보며 자유로운 산책길을 갈구했다. 매번 결혼식은 참석도 말고, 내가 부르지도 말자고 되뇌지만 쉽지가 않다. 괴상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와서 IPTV를 뒤지다가 오래전에 참다 참다 꺼버렸던 <체이싱 아미>를 켰다. 케빈 스미스의 영화는 별 볼 일이 없어 싫어하지만, 그의 헛짓거리가 왠지 다시 보고 싶어 졌다.


4. 케빈 스미스, 체이싱 아미 Chasing Amy, 1997

이기호와 장진을 지나 이제 할리우드의 케빈 스미스다. 그의 영화엔 예술이나 한답시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놈들이 그득하지만, 여전히 사회에 빌붙어 사는 루저들이 가득하다. 도통 개선될 여지는 없고, 지나치게 진지하니 보는 이들마저 실소를 머금게 되는 놈들이다. 그러고 보니 '이기호'가 그려낸 세상과 '케빈 스미스'의 캐릭터는 묘한 공명을 가진다. 걷기보단 잠시 앉아 햇살을 즐기고, 소소한 짓거리에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그렇다.

Chasing Amy, 1997

<체이싱 아미>의 홀든은 벤키라는 녀석과 컬트 만화인 '띨띨이와 중독자'를 그려 스타가 되었다. 그렇다고 뭔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 작업을 하고, 팬들과 싸우며 맥주를 홀짝거리다 야한 얘기나 일삼는다. 그래도 예술가라고 자의식은 대단해서 작품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그런 그에게 작품보다 중요한 그녀가 등장한다. 같은 만화가이자 쿨하기 그지없는 매혹적인 그녀 알리사다. 안타까운 점은 그녀가 미인인 데다가 꼴에 레즈비언이라는 점이다. 그녀에게 홀딱 빠진 홀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사랑을 고백한다. 벤키라는 놈도 문제가 많다. 녀석은 홀든을 알리사에게 빼앗기자 그녀와 그를 계속해서 공격한다. 그녀가 싸구려 창녀같이 여러 놈들에게 지퍼를 열었다느니 홀든을 자극한다. 친구와 애인을 모두 잃게 될 위기에 놓은 홀든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한다. 자 셋이 같이 자자. 쓰리썸? 아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끝으로 영화는 아리송한 끝맺음을 알린다. 도대체가 이게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사실 이 영화에서 내용은 별로 중요할 게 없다. 교훈도 이야기의 완성도도 무시해버려 마땅한 졸작이다. 하지만 이 어리바리한 세상의 녹록함이 좋다. 뉴저지는 뉴욕에 비해 허름하고 시시하다. 하지만 따듯하고 여유로운 카페가 있고, 벤치엔 홀든 콜필드가 우려해 마지않았던 겨울철의 오리들이 호밀밭에서 화목을 즐긴다. 홀든과 알리사, 벤키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어딜 둘러봐도 다른 사람은 없다. 소위 하위문화라 불리는 만화가의 세상과 성소수자들의 대화까지 담담하게 풀어낸 점 역시 케빈 스미스답다. 아마도 내가 이기호에게 기대했던 세상은 이 정도였으며, 이기호가 아직도 내게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의 마이너적 감성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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