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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1. 2016

미스 줄리, 스스로 손목을 긋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그리고 영화 '미스 줄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속하는 <햄릿>의 ‘오필리아’는 순종적이며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로 유명하다. 요즘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에서 보면 복장 터지는 여자지만, 그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추측해볼 수 있다. 햄릿의 배경은 알다시피 배경은 12세기 덴마크 왕가를 그린다. 철없는 30대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라우디우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을 자임한다. To be or not to be 한심한 소리들을 해대며 칼을 휘두른다. 그를 순종적으로 따르는 부인 오필리아(Ophelia)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왼손으론 가슴에 꽃을 움켜쥐고 한 손은 나뭇가지를 잡은 채 흐르는 물에서 죽음을 맞이한 여인. 가족 모두를 햄릿에 잃었지만 그를 사랑했던 순애보. 존 에버렛 밀레이의 명화 ‘오필리아’를 보고 있노라면 다소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한 동경을 담은 시대의 공기를 짚어낼 수 있다. 그림 속의 오필리아는 청초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한 관능적이며 묘하게 신비롭다. 그녀의 어떤 점이 수많은 호사가들과 예술인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든 햇살이 아름다운 여인의 몸까지 녹여버릴 듯 날카롭다. 연인의 배신으로 결국 죽음을 맞게 된 그녀는 그림으로만 세상을 부유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76) , 오필리아 (Ophelia-1852)

오늘 영화 <미스 줄리> Miss Julie, 2014를 보고 이 그림이 떠오르더라. 리브 울만 감독은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의 희곡 원작이 가진 몇 가지 심층적인 주제를 고스란히 옮겨오는데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다소 약해진 부분과 추가된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영화를 보는 사람이 집중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맥락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난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출구로 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보았다. 실내악 드라마로 불리는 연극적인 구조의 작품들이 가진 형식적(공간적) 제한은 곧 출구(빛)를 향한 드라마와 같다. 욕망은 모두 저 빛에 투신한 자를 위한 해방의 구조로 집결된다. 이 영화에서 우울증과 성적 갈망, 모성 결핍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처를 앉고 살아온 줄리라는 여성의 속내는 몸짓과 대사로만 추측해볼 뿐이다. 오로지 해방과 그로 점철된 죽음이 기다리는 그녀에게 오늘 하루는 죽음을 위한 제의祭儀일뿐이다.

이 영화에는 음침한 부엌과 어두운 하인의 방을 제외한 외부 시퀀스는 딱 세 개뿐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시냇가 장면, 그리고 숲 속에서 대화 장면, 영화 속 표현대로라면 그녀의 다리를 벌리기 위한 하인 존과 줄리의 밀회 신이다. 우선 숲 속 대화 장면은 의도적으로 갇힌 구조로 진행된다. 빛을 가리는 나뭇잎, 축축한 나무 아래서 나누는 대화는 두 남녀가 이 저택 내부에서 은거했던 욕망을 표출하는 유일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화 도중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를 주고받는다. 

“나는 둥근기둥 위에 올라가 앉아서 이제는 다시 내려갈 가망이 없게 되었어. 밑을 내려다보면 눈이 어지러운데, 그래도 내려가기는 해야 하고, 그렇다고 떨어져 볼 용기는 나지 않아.” 

두 사람은 청명한 자연을 앞에 두고도 가망이 없는 관계를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시냇물의 유려한 흐름이 줄리를 위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는 귀결로 자연스레 해석된다. 속된 충동으로 하인 존과 섹스를 마친 줄리는 자신의 파멸을 예감하고, 존이 젠더의 우위를 앞세워 그녀에게 면도칼을 쥐어주자 비틀거리며 저 빛의 해방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미끄러진 개울에서 그녀 역시 손목을 긋고 자연과 하나가 된다. 

영화 <미스 줄리> Miss Julie, 2014
“뉘우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최근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과 LGBT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이 사회적으로 합일되는 분위기다. 덩달아 최근에 잠잠하던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 역시 다시 가중되고 있다. 최근 영화와 소설에서 스스로 선택을 자임하는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고, 그것이 하나의 장르적 쾌감으로 해석되는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늘 이야기의 겉 가지에 불과했던 여성에게 칼이 쥐어진 순간, 그들의 죽음에도 이제 자주적인 선택의 시간들이 온다. 우리는 오필리아와 줄리가 어떤 심정으로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그 추측의 끝에는 몇 가지 손에 잡히는 것들이 있음에 안도한다. 오필리아는 미학적으로 완벽한 상태에서 죽어감이 마땅하다. 그녀는 개울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햄릿의 종반엔 주변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죽음의 양상을 희미하게 흐려놓지만, 그녀가 사고사 했다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선택이다. 그건 시대상이 원하는 여성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줄리는 주체적으로 손목을 그어 버렸다. 줄리의 어머니는 사회가 규정하는 성 담론에 항거하다 스스로 자살을 택한 인물이다.(영화가 아닌 희곡에 등장하는 설정이다.) 그녀는 남자에게 성폭력을 당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를 유혹해 자신의 성적 지위를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남자가 스스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에게 성스러운 죽음을 강요하자 표정을 바꾸며 이렇게 되묻는다. “나하고 같이 죽지 않을 테야?” 존이 그리던 세계가 상류층의 시시한 지위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실망한다. 그리고 스스로 빛을 향해 걸어 나간다. 수동적이고 헌신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오필리아를 미스 줄리와 대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비난이다. 이 희곡이 왜 오랜 시간 동안 공연이 금지됐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영화 <미스 줄리> Miss Julie, 2014

제스카 체스타인의 연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 심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덕지덕지 붙이고 사는 줄리의 심상을 스크린 위에 띄워냈다. 히스테리와 난데없는 비정상성이 돌출하는 캐릭터 안에 제시카 체스타인은 자신의 여성성을 지워버린다. 특히 자신이 아끼던 새가 존에 의해 난도질당하자 돌변하는 장면은 분노와 증오가 갑작스레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준다. 그전까지 권태와 무기력함에 남자를 조바심 나게 하던 우아한 여성이 갑작스레 관계를 전복시키는 이 장면에서 젠더 간의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마치 스위치가 켜지 듯 여성성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오로지 죽음을 갈망하는 인간이 남겨진다. 미스 줄리 스스로 손목을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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