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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1. 2016

'마스터'와의 작별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1967~2014)을 떠나보내며

1. 작별 전 신세한탄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며 절실하게 통감하게 되는 건 아무리 들여다보고 고쳐 봐도 실수는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막상 작성할 때는 보이지 않던 실수가 과장에게 보고하는 중 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부분은 걸리면 혼나겠는 걸 하는 부분에서 거침없는 폭풍지적을 받는다. 회사생활을 하기 전에는 실수를 하면 '아 내가 실수했네' 하며 머리를 긁적이면 그만이었다. 상대방도 '아 저런 바보 같은 녀석' 하며 웃음으로 넘어가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보고서를 쓸 때는 내가 한 실수가 어떤 여파를 미칠지 측정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차라리 상급자에게 질책당해 수정하면 다행이지만, 내가 귀찮아서 그대로 기안해버린 보고서가 다른 부서들로 전파되면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을 맞을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스스로 자처한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인데, 내가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여파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무섭게 느껴진다. 내 옆자리의 그녀는 단순 업무만 하면서도 나만큼 월급을 받는데, 앞자리 퇴직을 앞둔 노땅은 나의 반만큼도 일을 안 하면서도 내 곱절이 넘는 월급을 받아간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의 연속이라지만, 씩씩대며 보고서를 수정하는 그 순간만큼은 난 엄마를 잃고 홀로된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그래서인지 난 남의 실수에 대해서 관대하다. 시비와 갈등 자체를 피하는 요령을 깨달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성격 자체가 남의 실수를 면전 앞에서 들먹일 깜냥이 되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만 이러쿵 저러쿵 불평이 많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인정하게 된 것중 하나가 세상엔 정말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를 다 이해하려 하면 나만 골치가 아플 뿐이다.

카포티 Capote, 2005

얼마 전에는 보고서에 구매수량을 잘못 표기에서 회사에 누를 끼친 적이 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못 견딜 만큼 스스로에게 실망한 순간이었다. 구매수량에 0을 하나 더 붙인 것이 그대로 통과된 것이다. 꼼꼼하게 검토를 못한 잘못이 크지만, 애초에 잘못된 데이터를 넘겨주었던 상대 부서의 실무자의 잘못만 내 머리에 맴돌았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억울함에 속앓이를 했다. 그 날 퇴근 후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며 속을 달랬다. 무언가에 자꾸 얽매일수록 영화속으로 파고든다. 나쁜 버릇이지만 이제고치지 못할 내 취미가 되버렸다. 스스로 무언가를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점은 중요한 것이다. 꼬인 실타래를 푸는 노하우가 없는 사람은 늘 스트레스를 앉고 가지만, 그걸 풀 수 있는 도구가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무던해진다. 그래 영화가 있어 참 다행이야. 소설을 읽다가 침흘리며 잠드는 건 꽤 근사한 짓이야. 

우리 사무실에도 그들 스스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 후덕한 인상의 김과장은 스크린골프를 좋아하고, 스스로 몸짱이라 자부하는 김대리는 출퇴근으로 한강 자전거 라이딩을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박전무님은 늘 담배와 술로 자신의 신세한탄을 한다. 다음날이면 숙취로 고생하고, 그러다보면 일과는 금세 지나간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패턴을 빙빙 돌며 외로움을 달래나보다. 각각의 파티션 안에 자신만의 즐거움이 존해하다니 그건 어쩌면 기적이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

2. 마스터와의 작별

얼마 전 출근하는데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Philip Seymour Hoffman, 1967~2014)의 죽음이 문득 떠올랐다. 푸짐한 그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잠시 기사 내용을 읽고는 난 5초정도 걸음을 멈추고 망연하게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죽음, 늘 그의 연기에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모멸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위태로운 얼굴로 스크린에서 감정을 토해내는 그의 연기는 슬프기보단 무서웠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을 모아보면 세상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 주사기를 팔에 꽂다가 죽었다는 그의 지독한 현실은 어쩌면 스크린 속 연기를 감당하기 위한 자신만의 해독법이 아니었을까. 그의 연기가 참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냈던 것 만큼 그는 좀 더 강한 현실의 해독쥬스가 필요하진 않았나. 죽음과 함께 교차하는 최근에 본 그의 영화 <마스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랭카스터 교주, 마스터.

늘 내게 영감을 주었던 필립의 마지막은 며칠간 나를 짐짓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셔도 입이 텁텁해 계속 물을 마셔댄다. 필립의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노장 감독 시드니 루멧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다. 이 영화에서 필립은 돈에 미쳐있고, 마약에 중독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폐륜아를 연기한다. 섹스, 마약, 살인, 돈이라는 어둠의 상징들을 모두 흡수한 마귀처럼 연기한다. 일말의 동정심도 허용할 수 없는 자기 파괴적 에너지가 영화 내내 진동하고, 파멸을 향하는 필립의 얼굴에는 죽음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져있다. 난 생각하기 싫어도 그의 죽음에서 즉각적으로 이 영화를 떠올렸고, 마치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된 뫼비우스띠처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진 듯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이 영화를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스터The Master, 2012

3. 작별의식

시간이 좀 지나니 필립을 하나씩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이 출연했던 영화 중<마스터>는 마치 그의 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랭카스터 교주 역을 맡은 필립은 늘 그렇듯 모든 것을 갉아먹는 연기를 한다. 객석을 숨죽이게 만드는 랭카스터의 장악력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가 평생의 자신의 동반자라 믿었던 프레디와 헤어진 후 오랜만에 조우하는 장면에선 전에 없이 섬세한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마치 한 여인을 떠나보내는 남자처럼 그는 프레디에게 노래 한 곡조를 불러주는데 그게 내겐 마치 세상에 남기는 유언처럼 느껴졌달까. 떨리는 손과 붉은 얼굴로 '당신과 조각배를 타고 가고 싶은데 나 혼자서 가네요.'를 주절주절 흥얼거리는 필립이 무척 그립다. 그러고보면 그가 맡은 영화의 캐릭터들은 늘 삶의 스트레스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를 찾지 못하는 인간들이었다. 거친 육성과 다르게 속은 여렸다. 좀 더 잘 살려고, 맡은 자리에 충실하기 위해 더 강해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얻어버린 마음의 병은 치유하지 못해 늘 무리한 선택으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는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위압적인 연기로 내게 영감을 주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더없이 치열하게 잣대를 들이대던 무시무시한 마스터로 내게 기억될 것이다. 이제 그와의 작별의식은 여기까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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