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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17. 2016

코엔 형제의 겨울 판타지

코엔 형제 감독의 <인사이드 르윈> 그리고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

이제 다시 겨울이다. 결국 겨울과 다시 만났다고 해야 하나. 나는 유독 겨울을 좋아한다. 커피가 맛있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에서 나와 아늑한 영화관을 들어갈 때 느낌이 좋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이 겨울을 기다려왔다. 세탁소에 두터운 옷을 찾고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올 한 해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을 기억 하나 만들지 못했음을 절감했다. 시간의 걸음걸이가 더더욱 빨라지는데 난 거기에 발도 못 맞추고 어영부영 쫓아가기 바쁘다. 올 겨울엔 스키장에 가서 설원을 가로지르고 싶고, 겨울바다에서 라면을 먹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래 봤자 결국 늘 가던 영화관과 북촌방향으로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낼 테지만. 물론 그것도 좋다. 특별한 기억도 없이 사그라져만 가는 것 역시 익숙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계절이 다 소멸이라도 한 것처럼 늙은이 심보가 된다. 그러던 중 짐짓 오늘은 여유로운 주말 오후라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이 책 저 책 뒤적이고 있다. 며칠 전 근처에 사는 군대 동기형과 만나 고기를 먹고 같이 영화를 봤다. 형은 여름을 기다리고 있더라. 해변과 파라솔 그리고 여인들과 뜨거운 햇살 아래서 먹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그리더라. ‘음 역시 세상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천지로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고기는 타고, 대화는 점점 능글능글 야한 여자 얘기로 흘러간다.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영화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겨울에 대한 영화 중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영화가 있다. 극장을 세 번이나 찾아가서 봤던 <인사이드 르윈>이다. 내 마음을 모조리 가져간 코엔 형제의 이 음악영화는 추운 겨울 극장 안을 미열에 머물게 했다.

코트 한 장 살 돈이 없어 빈털터리로 거처 없이 돌아다니는 '르윈 데이비스'는 누구보다도 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같이 공연하던 친구는 죽었고, 친구의 여자 친구와 사고를 쳐서 산부인과에 돈을 지불하러 다닌다. 아름다운 그녀는 여전히 오르지 못할 나무로 자신을 증오하고, 품 안의 고양이는 행방불명이 되어 떠나간 지 오래다. 이 작품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르윈이 터벅터벅 길을 걷는 장면이다. 추워서 얇은 외투를 여미지만 도무지 이 겨울은 그를 용서할 맘이 없어 보인다. 이제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 줄을 훌쩍 넘어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 나이의 청춘은 그제야 현실과 꿈의 거대한 균열을 깨닫게 된다. 르윈은 어두운 무대에서 절절한 노래를 부르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 돈이 없어 남의 집 소파를 전전하고, 공연 후 익명의 어둠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는 그저 그런 인생이다. 과연 여기보다 어딘가에 더 나은 인생이 있긴 있을까. 르윈 데이비스는 유독 실수가 많고, 인생의 고비마다 미끄러지는 친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르윈>의 여정에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건져 올리는 희미한 낙관이 있다. 난 끝없이 비루 해지는 르윈 데이비스의 인생을 보며 가차 없이 한심한 위로를 받는다. 난 결국 르윈처럼 모두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겐 이 블로그가 그렇고, 우리 형에겐 그 비싼 옷들이, 르윈에겐 그가 푹 빠져있는 기타 선율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가 되는 그런 것들이다.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내게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난 <인사이드 르윈>를 아버지와 관람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단둘이 외출하는 것이기에 좋은 영화를 보고 싶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할 수 없었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수 아트나인'에서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향할 때 코엔 형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와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지 못하기에 <인사이드 르윈>은 좋은 선물이 되었다. 사실 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그 해 부산영화제를 찾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새벽 6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도 소용없었다, 코엔을 좋아하는 극성팬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결국 그 발끝도 보지 못하고 서글픈 마음으로 부산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르윈 데이비스와의 인연은 지금처럼 깊고 더 애틋해지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찾아온 것은 아닐까. 마치 고양이 율리시스가 르윈보다 더 복잡한 여정을 거쳐 결국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고양이 이름이 율리시스라니.

남자 중에 캐리 멀리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귀여운 눈웃음과 그와 대비되는 고혹적인 몸짓이 있다. <언 에듀케이션>부터 시작된 그녀의 행보에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캐리 멀리건은 배우로서의 아우라나 조각 같은 외모를 통해 관객을 사로잡는 스타일의 배우가 아니다. 영국 배우 특유의 삐딱함이 있고, 평범한 여성이라고 믿게 만드는 흔들거림이 있다. 그녀보다 어떤 여자가 더 어울리는 호칭으로 느껴지고, 허리에 손을 얹고 화를 낼 때면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매력적인 표정을 짓곤 한다.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 Kumiko, the Treasure Hunter, 2014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 Kumiko, the Treasure Hunter, 2014

코엔 형제 얘기를 좀 더 보태본다. 최근에 코엔 형제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96년작 <파고>에 관한 농담 같은 영화가 등장했다. '쿠미코, 더 트레이져 헌터'라는 제목의 기이한 영화다. 이 기이함에는 우선 <파고>의 시작 농담처럼 깔아놓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라는 멘트에서 시작한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춥고 작은 시골 도시 파고와는 수천 키로가 떨어진 인구 3,500만 명이 살아가는 대도시 도쿄엔 수많은 인간군상이 모여있다. 29살의 쿠미코는 어느 날 해변에 있는 동굴에 갔다가 영화 <파고>의 비디오를 발견한다. 장래가 없는 회사 생활과 모욕을 주는 상사, 자신보다 더 뛰어나고 매력적인 후배들에 치여 기한번 제대로 못 피고 살고 있는 이 독신여성은 누구보다 절박한 외로움을 느낀다. 랜만에 만난 학창 시절 친구와 어떻게든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덤벙대는 모습에서 이거 큰일인걸 하고 생각했다. 위기에 빠진 그녀에게  영화 속 파고에서 칼 쇼월터(스티브 부세미 분)가 돈가방을 눈 덮인 파고에 묻는 장면을 보고 보물지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2001년 도쿄에 사는 토니시 타카코라는 여성이 미네소타 주 북부에서 시체로 발견된 도시 괴담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파고는 실제의 이야기라는 거짓말로 시작되지만 쿠미코의 여행은 일정 부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이불을 몸에 두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어가며 ‘파고’라는 지명의 장소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낭만적인 한 편의 동화 같다. 잔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거짓말 속으로 투항하는 얘기지만,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기억을 만들려는 용기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파고로 가는 길엔 분명 추위를 잊게하는 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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