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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3. 2016

운전대를 위한 잡담

영화 멋진 하루(My Dear Enemy) 그리고 영화 로크(LOCKE)

운전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운전대 잡는 걸 좋아한다. 시동을 걸자마자 미세한 진동과 함께 즐겨 듣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날의 날씨에 맞춰 선곡을 하고, 라디오 채널을 돌려보며 기분을 점검한다. 운전이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동반한다.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누군가와의 약속이 없이도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근사한 카페와 한적한 공원도 좋다. 비 오는 날의 적막도 그런대로 봐줄만하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운전하는 장면이 등장하면 몸과 마음이 조응한다.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면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다.

멋진 하루 My Dear Enemy, 2008

티격태격하는 희수(전도연)와 동운(하정우)은 과거 연인이자 채무자와 채권자로 얽혀있다.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며 서울을 유랑하는 두 사람은 지난날 흘려놓았던 자신들의 흔적들을 애써 모른척한다. 차창 밖으로 한강은 무심히 흘러가고, 상처를 덧내지 않기 위해서인지 끝내 침묵한다. 차창에 비친 옆자리 녀석의 윤곽만으로 어깨에 든 힘을 풀어놓는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서로 앉아있을 때면 정적이 흐르는 시간들이 좀 더 특별해진다. 그리고 좀 더 어색해지는 순간이면 스리슬쩍 터놓게 되는 시간이 찾아온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내밀한 분위기가 흐르고, 좀 더 진실에 가닿는 말들로 들리게끔 유도한다. 오랜 시간 동안 만나던 친구와 차에서 얘기할 때 많이 싸웠던 것 같다. 좋았던 시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유독 싸웠을 때 했던 말들만 자주 떠오른다. 가시 돋친 말들은 머리를 텅 비게 만들었고, 그 진중함이 더 이상 장난으로 들을 수 없게끔 상대를 쏘아붙였다. 차를 멈추고 어두운 길 근처의 던킨도넛 간판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아 이제 끝났구나.’ 눈을 꼭 감았던 기억도 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꺼내고, 굳이 새겨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가 차 안에서 공명한다.


오늘 조용하게 사라진 영화 <로크>를 보는데 로크라는 남자(톰 하디 분)는 시작부터 시동을 걸더니 끊임없이 블루투스로 전화를 걸어대더라. 쉴 새 없이 전화는 오고 가고 격한 감정의 말들이 차 안에서 울려 퍼진다. 주인공 로크는 지금 회사의 지시를 어기고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기의 탄생을 보기 위해 운전 중이다. 회사 상사는 미쳤다며 소리를 지르고, 그 대신 졸지에 공사현장을 떠맡게 된 부하직원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다. 속 모르는 아들 새끼는 축구 얘기나 해대고, 시카고의 본사에서는 해고 통보를 보내온다. 아내에게 바람피운 게 들켜 이혼 위기에 처했으며, 딱딱한 목소리의 내연녀는 출산 전 그에게 사랑을 강요한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로크가 전화통을 붙잡고 구제해야 할 것은 책임과 윤리다.

로크LOCKE, 2013

그는 산모의 남편임을 확인하려는 병원의 전화에 그녀를 잘 모르는 여자라며 잘라 말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내간 든 생각은 그는 왜 이 작은 차 안에서 주어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모든 게 과연 전화로 할 만한 얘기인가. 그는 2시간도 안 되는 주행 시간 중에 직장과 가족, 집,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박탈당한 위기에 몰렸다. 일, 가장, 아버지로서 모든 역할을 붙잡고 늘어지지만 전화를 하면 할수록 나락에 빠진다. 설득, 사과, 조정 따위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로크는 정신이 없다. 어느새 운전을 하는 장면들에 피로감이 엄습하고, 뻥 뚫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책임감의 굴레로 뛰어드는 꼴이다. 

로크는 끊임없는 전화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백미러로 텅 빈 뒷좌석의 그 누군가를 의식한다. 영화 <로크>는 물론 1인극이지만, 로크는 전화 사이사이에 지속해서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죽은 아버지가 뒷자리에 있듯 의식하며 대사를 쏟아낸다. 자신은 아버지처럼 책임감 없는 아들이 아니고, 지금 이 곤란을 잘 이겨낼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그가 왜 인생을 걸고 내연녀의 출산에 집착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로크는 눈을 치켜뜨고 아비와 닮은 현실을 부정한다. 승용차의 성능이 좋아지고, 운전 중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많아지면서 운전은 주인공의 고독을 위한 시간으로 머무르기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세상 그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상실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속절없이 떨어져 나간다. 그도 의식하고 있다. 잔뜩 긴장된 어깨, 그리고 거리의 네온들이 이 고독한 싸움을 기억하게 한다. 로크에게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형 자동차가 있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긴 장거리 운전을 마치고 자신의 인생이 변형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이 길 위에서 뭘 한 건가. 난 연신 자신의 수염을 만지며 흐릿한 눈으로 창을 바라보는 로크를 떠올린다. 


오늘은 세탁소와 마트, 영화관, 카페, 공원을 차로 돌았다. 한강을 가서 걷기도 좀 하고, 눈도 좀 붙였다. 이제 혼자서 많이 익숙해졌다. 폰은 조용하고, 약속도 없는 주말이다. 오늘은 영화관을 가기로 한다. 뜨끈한 커피를 들고 운전으로 지친 눈을 풀고 극장 안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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