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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27. 2016

영화 최악의 하루, 사랑의 포말성

사랑의 포말성에 집중하는 김종관 감독의 작품세계

김종관 감독의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의 단편영화에 깊은 영감을 받은 이라면 <최악의 하루>가 변하지 않은 지점에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설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가 좀 더 나아간 것을 확인하러 영화관을 찾은 이라면 그가 변해버린 조그마한 지점에 눈길을 모을 것이다. 흘러가는 서사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 그 분위기에 침잠하는 그의 글은 유독 문장의 언저리를 떠나지 못한다. 느낌과 감정의 결에 집착하는 행태도 여전하다. 이런 인물들의 미진함에는 짧은 이야기에 어울리는 감성이 묻어있다. 끝없이 차오르는 서사의 추진력은 애써 모른척하고,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 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은희는 여전히 김종관스럽게 서툴고 어수룩한 사람이다.

영화 최악의 하루, 처음부터 열심히 걷던 은희는 끝내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다

배우 지망생인 은희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서촌에서 길을 잃은 일본인 료헤이를 우연히 만난 은희는 그에게 길을 안내하며 그와 가까워진다. 잠깐 커피를 마시며 복잡한 생각을 잊어가던 그녀는 급히 남자 친구의 연락을 받고 남산으로 간다. 막장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남자 친구는 그녀를 열 받게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SNS을 보고 찾아온 유부남 운철을 만나 고약한 말을 들은 그녀는 허탈한 마음에 혼자가 되어 남산을 거닌다.

단편 영화로 유명한 김종관의 장편 데뷔작 <조금만 더 가까이>는 사랑의 일대기를 고스란히 다루지 않고 한 대목만 잘라낸 이야기들의 옴니버스다. 이 영화를 장편으로 칭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같은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최악의 하루> 속 은희와 소설과 료헤이는 <조금만 더 가까이>의 그들과 연장선상의 세계에 있다. 이별을 다루는 이야기라 칭하면서도 감정이 고조되는 정점을 지나, 사랑이 흐트러지고 난 후를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질척대고 혼란스러워하다 끝내 한 마디 내어놓기도 망설여지는 김종관의 세계가 그렇다.

한 여름의 판타지아에 출연했던 이와세 료는 이제 서촌 일대와 익선동을 거닌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어려워진 현실이다. 어떤 서사를 마주하던 사랑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면 우리는 올드 스쿨의 향취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제 좀 진부해지고, 오래된 유행 가사처럼 사랑은 피곤한 현실의 외딸은 주소를 말한다. 이는 영화보다 소설에서 더 그렇다. 최근 읽은 황정은, 김애란, 김경욱, 김중혁 등 일련의 소설가들이 그리는 사랑이란 애초에 진지하지 못하다. 사랑과 그에 부가하는 결혼과 지친 연애를 이내 떨쳐내고 그들은 혼자 살면서 사랑이 일어나고 소멸되는 과정을 관조하는 의식이 강하다. 김종관은 어쩌면 이런 사랑의 기조를 가장 먼저 그렸던 감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김종관의 이야기들은 감성적이지만 감정의 진폭이 적은 사랑 주변부 기슭에 머문다.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는 한 번도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늘 하루 이 맑은 하루에 더 정리된 관계만을 원할 뿐이다. 그녀와 노니는 세 명의 남자는 사라져 무방하고, 그녀의 걸음을 같이 할 완전한 타인, 기초적인 의사소통 외에 어느 것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허구의 남자(소설가)가 필요할 뿐이다. 덜한 감정의 깊이가 진실에 가깝다는 아이러니가 단점으로 보여도 어쩔 방법이 없다. 난 그만큼 사랑 없이도 무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니까.      

김종관하면 정유미에서 이제 한예리가 되어간다.

육체적 관계가 동반되었음을 염두하고 하는 은희와 남자들의 대화는 시종일관 흥미롭다. 내게 김종관에게 지닌 고정관념,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의 결을 그린 감독이라는, 그런 관념을 일시에 소거하는 은희의 기개는 명확하다. 그들의 관계는 동거와 모텔에서 지속되어 왔고, 그녀의 욕망은 지나치리만큼 솔직하다. 그건 전처와 재결합하지만 너와 관계를 논해야 하고, 내가 배우로 성공하면 널 차 버릴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여전히 사랑한다는 맹세처럼 공허하다. 은희는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도 단순해지지 못하는 관계에 스스로 자책할 뿐이다. 그들이 고민하는 관계의 지향점은 사랑이라는 거대 관념이 아닌 오늘 하루 사랑받을 수 있는 쾌함의 정도에 있다는 단순함이다. SNS에 날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멘션처럼 진지하지 않다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영화 속 료헤이가 한 기자의 투정 어린 질문에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의 욕망과 행복엔 관심이 없다는 답을 할 때 모든 상황이 무효화되듯 허탈해질 때 영화는 한 꺼풀 벗겨지듯 현실과 조우한다. 이 자조 섞인 말이 김종관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은희와 남자 친구들의 서사가 일어나는 남산은 소설가 료헤이가 그리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역으로 은희의 일상을 주석처럼 덧글을 다는 것이 료헤이가 말하는 소설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병행하면서 김종관은 자신이 말하려는 현대의 사랑을 이처럼 참신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난 김종관이 끝없이 보편 서사를 거부하고 이 단편 소설 같은 영화를 지탱하길 기대한다. 참기 어려운 욕망, 분출하고 싶은 욕구, 가슴이 쿵쾅거리고, 몸에서 땀이 흐르는 순간을 지나 이제는 시큰둥해진 서늘함이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김종관의  <그러나 불을 끄지 말 것>, 이 작품은 단편소설과 수필의 중간지점에 있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사랑타령이 과포화된 시대를 지나 이젠 대중문화를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환상의 신기루를 창조한다. 도시의 걸음걸이와 근사한 카페, 하늘의 높고 맑음이 사람을 대체할 감성으로 자리한다. 딴청이라도 부리듯 김종관은 자신이 사는 동네를 내게 소개하며 에둘러 위로를 말한다. 서촌과 사직동, 익선동은 김종관이 노닐던 홍대와는 다른 고즈넉함이 있다. 흔해 빠져버린 홍대에서 벗어난 그는 이제 가을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공간에 시선을 공유한다. 영화의 촬영지를 보며 홍상수 감독의 몇몇 영화들의 흔적을 찾긴 어렵지 않다. 사직동과 그 주변 골목들의 모습에서 시작해 마을버스로 이어진 익선동과 경복궁 근처 카페들의 모습들은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자유의 언덕>의 흔적들을 공유한다. 그리고 마침내 남산 공원의 청명한 기운이 마침 영화의 개봉 시기인 가을의 문턱을 떠올리게 해 근사한 걸음걸이를 선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와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이 떠오르는 남산의 시간은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우연과 억지가 소설과 허구라는 환상과 맞물려 허탈함과 반가운 종결의 위로가 교차되는 시점.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김종관의 영화는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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