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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03. 2016

작은 영화관에 작별을 고하며

씨네코드 선재와 스폰지 하우스를 동시에 기억 저편으로 보내며

중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영화를 CD로 굽고, 작은 포스터를 모아 방에다가 덕지덕지 붙이며 내 애정을 과시했다. 구워놓은 CD는 틈만 나면 꺼내 만져보고, 밤새 보다가 잠들곤 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건 한국에 미개봉한 시네마테크 고전 클래식이었다. 오로지 나만 그 느낌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마치 유적지에서 유물을 캐는 고고학자가 된 느낌을 주었다. 난 영화를 모으고, 만지고, 소유하는 것 마저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마저 관람의 한 형태가 된다.

광화문 씨네큐브, 인디스페이스, 스폰지 하우스, 씨네코드 선재 (좌측부터 시계방향)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서울의 모든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는 것이다. 서울의 편리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런저런 동네를 찾아다닌다. 그 도시 그 동네엔 그들만의 영화관이 있다. 난 손님이 되어 그들의 영화를 섭취한다. 그게 내게 큰 힘을 준다. 영화를 다 본 후 걷는 낯선 동네의 골목길도 좋고, 햄버거나 커피 역시 각 동네마다 맛이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처럼 영화 자체를 관람하는 것 이외에 영화관이 주는 느낌과 그 동네의 풍경 그리고 커피의 맛까지 모두 하나로 이어져있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그저 영화 하나만을 가지고 같은 영화관을 찾진 않는다.

다른 동네 영화관 중에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도시는 아무래도 광화문을 중심으로 둘러싼 네 군데의 예술영화 전용 영화관이다. <씨네코드 선재>, <스폰지하우스>, <미로스페이스(인디스페이스)>는 항상 남들이 별로 찾지 않는 영화를 시간 내서 보러 오는 관객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준다. 난 그들이 준비한 영화를 보기 위해 주말마다 어지간히도 부지런하게 한 시간이나 걸리는 광화문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럴 땐 나 스스로 감탄한다. 민진아 너 참 영화 좋아하는구나. 이런 에너지를 좀 더 유익한 곳에 썼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하지만, 결국 이만큼 행복한 기운을 주는 것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선재와 스폰지하우스에 대한 작별인사도 못하고 보낸 것이 늘 맘에 걸린다. 내 연애와 외로움과 고독을 함께한 공간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음에 심히 유감스럽다. 그 애틋함을 이 글을 빌어 고백해 본다.

좋은 영화관을 선정하는 기준은 영화도 영화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주변에 좋은 커피집과 산책로가 있냐는 점일 것이다. 강남에서 영화를 보기 싫은 이유는 강남역과 테헤란로를 둘러싼 그 무지막지한 인파가 생각나고, 명동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영화 보기 좋은 동네는 아니다. 하지만 광화문역 주변을 비롯한 청계천, 인사동, 삼청동, 북촌과 서촌 등지는 걷는 이들을 위한 축복의 공간이다. 영화의 진짜 재미는 다 보고 나온 후 걷고 있을 때 떠오르는 상념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 되뇌는 말들이 진짜인 경우가 많다. 이때 수많은 인파와 경적소리가 내 생각을 끊어낸다면 좋은 영화관이 될 수 없다. 좋은 영화관은 항상 일정 수준의 아늑함을 유지시킬 수 있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

최근에 가본 영화관 중 최고는 아무래도 부산 <영화의 전당>이다. 사실 부산을 영화의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대표적인 영화관이 없었는데, 영화의 전당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물론, 영화 관련 강좌를 비롯해 대중영화와 예술영화 그리고 편안한 산책과 휴식을 보장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주변엔 공원과 넓은 도로가 펼쳐져 있고, 좋은 커피가게가 즐비해 만족스러운 기분을 준다. 별 세 개짜리 영화가 무려 네 개처럼 보이는 효과를 준 달까. 무엇보다 여차하면 버스를 타고 해운대 바다까지 갈 수 있다는 점도 보너스다. 영화의 전당은 상영 프로그램도 무척 다양해서 난 그날 3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곤 배를 두드렸다. 자주 찾아올 수 없는 근사한 영화관을 꾸역꾸역 섭취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하루 종일 영화의 전당에서 영화에 푹 빠져 놀았다. 

스폰지 하우스

최근 내가 사랑하는 영화관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작별을 고하며 쓰는 이 글에 마음을 놓기 쉽지가 않다.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이 임대차 계약 만료로 5월12일에 영업을 종료했다. 서울 압구정과 명동에 이어 2007년 12월13일 현재의 중구 태평로에 광화문점이 문을 연 지 햇수로 10년 만이다. 예술영화관이 수입을 내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스폰지하우스 광화문도 버터지 못한 것이다. 또한 소격동의 자그마한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 잡았던 씨네코드 선재 마저 작은 이별 영화제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건물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이 곳에 영화가 없다는 자각은 늘 즐겨가던 소격동을 슬픈 공간으로 만들었다. 천만 영화가 판치는 상황에서 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독립, 예술영화 상영관들이 사라지거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 곳에서 어릴 적 연애의 기억을 깊이 간직했던 나로써는 더더욱 마음이 무겁다.

비포 미드나잇, 제시와 셀린느 같이 늙어가서 다행이야

추억의 장소 스폰지 하우스에서 가장 재밌게 본 영화는 <비포 미드나잇>이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이 시리즈와 함께한 시간이 내가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시점과 비슷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엔나로 가는 열차 안에서 서로를 훔쳐봤던 제시와 셀린느의 수줍은 모습부터 시간에 쫓기며 파리의 골목들을 부지런히 걷고 있는 이상한 풍경들이 기억에 빼곡하다. 스폰지 하우스에서 커피 한 잔을 사 가지고 들어가 그리스의 두 사람과 조우했다. 고대 유적지와 구석진 골목에 다다른 고단한 인생들이 대화들 틈에서 나를 울먹이게 했다. 나와 함께 해 온 그들이 여기 있음에 안도했다. 영화 속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의 뜨거움은 없지만, 늘 열정적으로 인생에 관한 얘기를 한다. 지금 사는 이 시간 가장 중요한 것을 명확하게 느끼며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이 정겹다. 아마 내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한 거겠지.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더없이 집중하고 얘기하는 것. 스폰지하우스와 씨네코드 선재에서 보낸 시간들에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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