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지적인 뉴욕의 투덜이 스머프
어려서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무릇 예술가라 함은 출근은커녕 어디선가 발랑 누워서 영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사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며칠간 먹지도 않고 일필휘지로 걸작을 써내는 줄 알았다. 이렇게 예술가를 터무니없게 오해하니 매일매일 출근하는 부모님의 삶을 우습게 봤다. 별 볼 일 없는 살림살이에 남다를 게 없는 말이 오가는 우리 집은 너무 평범했다. 예술가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도 화려한 부를 누리며 사는 데 반해 부모님은 늘 고요했다. 그 평범함을 지켜내기 위해 종일 어떤 모욕을 견디는지 알 리 없었다.
난 학교가 끝나면 텅 빈 집 문을 열고 소파에 누워서 비디오를 봤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밖으로 도는 형은 밤늦게야 돌아왔다. 난 상영관처럼 캄캄한 거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두 시간짜리 스펙터클을 즐겼다. 내가 사랑했던 예술가는 '우디 앨런'이었다. 난 그의 자기 중심주의를 좋아했다. 영화마다 자의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본인 위주로 판을 짜는 게 부러웠다. 그런 볼품없는 외모로 미녀와 쉴 새 없이 노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나도 감독이 되고 싶었다. 자기가 먹물 좀 먹었다고 잘난 체를 해도 영화라서 봐줄 만했다. 무엇보다 우디 앨런은 시도 때도 없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못난 인간이었음에도 스크린 속에서는 사뭇 감각적으로 보였다.
우디 앨런이 영화 속에서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고민은 내 글쓰기에 토대가 됐다. 그가 지닌 자기중심적 예술은 내 글에 이기적인 욕망이 들어가는 걸 용인해줬다. 난 간혹 수다를 떨고 싶어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지, 무슨 예술적인 야망이라는 게 있는 건지 헷갈리곤 한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다 남은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이 아닐까 근심한다. 그럴 때마다 우디 앨런이 나타나서, 네가 그렇게 말하면 자신은 뭐가 되냐며 따졌다. 그는 매번 자기 반영을 일삼는 영화만 만들었으니까. 그가 쓰던 글, 연애, 그가 읽던 책, 그가 거니는 동네, 단골 식당까지. 난 그의 지극히 사적인 영화 덕분에 조금 더 뻔뻔하게 나를 팔아먹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우디 앨런은 본인이 자주 가는 뉴욕 단골 식당과 커피집을 영화에 고스란히 가져다 썼다. 뉴욕 거리를 고스란히 영화에 옮기다 보니 로케이션이라고 할 게 없었다. 단출한 스텝과 배우가 모여서 대사만 잔뜩 들어간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뉴욕 하면 빠질 수 없는 재즈 넘버가 쉬지 않고 흘렀다. 그의 작품을 왜 뉴욕 힙스터들이 좋아했을지 알만하다. 지금 노아 바움벡처럼 우디 앨런은 어떤 권위에도 눌리지 않고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짰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꽉 조여 맨 직장인이 즐비한 맨해튼에서 성기고 엉성한 이야기만 하는 우디 앨런의 영화야말로 당시의 청춘에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아니었을까. 나도 우디 앨런을 따라 한답시고 내 일상을 근사하게 꾸미는 글을 자주 썼다. 세련된 단어를 고르고 있어 보이는 사유를 끄집어와서 내 것인 양 훔쳐 썼다.
우디 앨런은 그 누구보다 뉴욕을 사랑했다. 그의 영화를 볼 때면 뉴욕을 같이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난 컴컴한 거실 소파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기 가서 꼭 커피를 마셔봐야지. 나도 저길 꼭 걸어봐야지. 내가 사는 동네를 사랑하는 글을 써야지. 영화 <한나와 그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뉴욕을 종횡무진하는 영화다. 우디 앨런은 신경질적인 영화 심의위원 미키로 나오는데, 심한 건강 염려증에 걸린 환자다. 그는 어느 날 청력이 떨어진 걸 느끼고 병원을 찾는데, 혹시 모르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진단에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터무니없게도 몇 달 후면 자신이 죽을 거라 믿고 초조해진다. 조급해진 미키는 본래 믿던 유대교를 비롯한 가톨릭과 힌두교까지 가리지 않고 기웃거린다. 어느 신이든 날 구원만 해준다면 손을 덥석 잡을 태세다. 하지만 그는 니체도, 프로이트도, 소크라테스도 잡지 못했던 구원의 동아줄을 어느 시구에서 찾는다. 결국 새로운 사랑을 하라는 어느 무명 시인의 말에 감화된다. 우스꽝스러운 결론이지만 그는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술집으로 간다.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했던 기억도 잊고 쉴 새 없이 뻐꾸기를 날린다. 항상 이런 식이다. 뉴욕은 로맨스의 도시니까. 조울증에 가까운 감정 기복은 기본이고 죽음과 웃음을 오가는 시니컬한 질문이 이어지지만, 종국엔 연애한다. 다 때려치우고 전화통을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여차저차 침대에 눕는 연인이 보인다.
난 어느 여성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디 앨런과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만약 불치병에 걸려 석 달 후에 죽는다면 뭘 하실 건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누구나 꽤 그럴싸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막상 바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대체 태어나서 한 게 뭐가 있나 싶다. 몸이 들끓고 어안이 벙벙해서 일을 그르친 거 빼고 제대로 한 게 있나 싶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간 걸 빼면 내가 생각이란 건 하기나 하나. 그렇다고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빨던 얘기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커피를 조금 마신 후에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호의란 경험상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마침내 처음 직장에 취직했을 때를 떠올렸다. 계좌에 내가 번 돈이 차이고, 새로운 사람이 다가왔던 때. 누구에게나 움푹 파인 기억 하나 있게 마련이다. 우리 대화는 한참 이어졌고 서로를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난 이런 순간을 우디 앨런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내 이상형은 영화 <애니 홀>의 애니다. 외모도 다이앤 키튼이 이상형이고 여전히 우드스톡이 열리는 뉴욕 베델 평원에서 히피같이 입는 이에 끌린다. 윤종신의 발라드 '애니'가 내 노래방 18번이다. 극장에서 잠시 줄을 서는 와중에도 같이 쉴 새 없이 옥신각신할 수 있는 수다쟁이 애니. 너른 포용력을 지닌 애니. 짜증 나고 주둥이만 산 우디의 투정을 다 기꺼이 들어주는 그녀. 툭하면 다른 사람을 욕하고 쉴 새 없이 열등감을 쏟아내는 우디를 토닥여주는 너그러운 애니. 엉엉 울다가도 우디의 어깨에 기대며 내 모자람과 네 모자람이 다르지 않다는 걸 상기하는 괘씸한 애니. 내 여자가 아니라도 곁에 있고 싶고 이미 내 일부가 돼서 지울 수가 없어져 버린 그녀. 내 희망은 애니처럼 불멸의 연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그의 작품이 더는 새롭지 않아서 정을 뗀 적도 있었다. 오래 사귄 연인처럼 권태에 싫증이 났다. 식탁에서 들은 이야기, 화장실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신물이 났다. 이제 자의식을 다 털어먹어서 소재가 고갈됐나 싶었다. 난 우디의 작품에 나오는 네 명의 상심한 주인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장하는 내용도 너무 익숙했다. '또 그 얘기야?' 전에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팬들을 얼어붙게 할 전형적인 갈등이었다. '그는 왜 이런 것을 쓰는가? 그는 이제 다시는 새로운 것을 토해내야 한다는 작가의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제 실버타운에 가서 노년을 보낼 참인가.' 애니 홀과 낡은 침대맡에서 떠들던 대화는 이제 더는 기대할 수 없을까. 세월이 이렇게 야속한 거다. 늙숙한 예술가의 쇠락을 지켜보기가 어렵다. 스캔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타블로이드 신문 기사 속 우디 앨런은 내게 낯설다.
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미진함에 시달렸다. 자리를 옮겨서 알탕에 소주를 시키고 그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영화는 과언이었지만, 말이 말을 부르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의 얘기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내 얘기도 보태고 싶었다. 그에게 연애 상담도 하고 요즘 애들 사는 꼬락서니도 같이 씹고 싶었다. 그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뉴욕의 어느 커피집에서 실컷 수다나 떨었으면.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얘기해줬다. 자기 얘기를 하면 세상 중심이 될 수 있으니까. 여러 동심원을 그려도 그 중심은 항상 내가 될 수 있으니까.
꽤 오래 써왔는데 아직 미처 쓰지 못한 게 많다. 시간 탓을 하자니, 염치가 없고, 우툴두툴한 돌멩이 같은 착상을 세공할 능력이 안 되니 자꾸 폰만 붙들고 좋아요만 누른다. 그렇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는 중이다. 올해 내가 몇 살인지 떠올릴 때마다 기겁한다. 퇴근하고 카페에 앉으면 글감 노트를 편다. 살짝 조미료를 친 상상의 도막. 애틋한 마음이 금세 볼품없이 하찮아질까 두려워하는 기억. 포니테일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누나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순간. 들끓는 광기와 홀린 듯한 추종으로 이루어진 양상을 멀찍이서 오래도록 지켜보는 장면. 그걸 어떻게 글에 담아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우디 앨런이라면 어땠을까. 내 글의 시작은 항상 거기서부터다.
내가 가진 예술가 상은 병든 낭만주의에 가깝다. 이것도 우디 영감의 유산이다. 가령 이런 상상을 한다. 내 글을 읽은 모 신문 문화부 기자가 작품 속 이야기는 자전적이냐고 물어온다. '그거 다 허구죠. 문학적인 변주 모르세요?' 난 잔뜩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글은 진실이지만 엄연히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서 나머지는 독자 상상에 맡기겠다며 건방을 떤다. 하지만 건방을 떠는 것도 잠시, 책상에 앉으면 그걸로 끝이다. 대충 얼굴과 발을 씻고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쓰던 글을 다시 성기게 이어간다. 지웠다 고치기를 반복한다. 불안이 차오르고 다시 못된 생각에 빠져서 그녀를 저주한다. 우디가 침대맡에서 하던 불평에 나도 고스란히 이입한다. 생을 시시각각 체험하고 또 풍부히 예감하는 글은 어디에 있을까. 우디 앨런의 뉴욕 영화처럼 달콤 쌉싸름한 그런 거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