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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2. 2020

올리비에 아사야스

삶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가

 영화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예민하게 살핀다. 영화산업의 분업화로 작가주의가 사라져 가는 요즘도 그는 제 목소리를 영화에 새긴다. 최근 그가 관심을 보이는 화두는 기술 발달이 일상에 끼치는 파급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회는 개인성에 적대적이고 개인이 공동(空洞)이 될 것을 기대한다”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요즘엔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켜내려면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바삐 움직이는 일과는 사색할 틈이 드물고, 오늘만 수습하려는 맞는 출근길엔 낭만이 메말랐다. 지하철에 빼곡한 고개 숙인 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최면에 걸린 듯 뭔가를 응시한다. 대화의 헤게모니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장악한 지 오래고, 한 권의 책은 더는 마음을 붙들지 못한다. 종일 자그마한 첨단기기를 붙들고도 한 문장도 쓰기 버거워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대신한다. 삶에 문화와 언어가 부재해서인지 좀처럼 별다른 의미를 건져낼 수 없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시대가 당면한 보이지 않는 균열을 짚어내는데 탁월한 감독이다. 특정 사안에 해법을 제시하기보단 현상을 들여다보며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미처 다다르지 못한 질문을 끄집어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걸작 두 작품에 관해 얘기해보면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논-픽션 (2018)


 우리는 늘 믿는 바와 실제 삶의 모순에 직면한다. 목구멍은 포도청이라 생각과 다른 선택을 반복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적당히 타협한다. 영화 <논-픽션>의 프랑스 원제는 '이중생활'(Doubles vies)이다. 영화는 이념과 실제 사이 딜레마에 선 이들을 무대에 세운다.

 출판사 편집장 알랭(기욤 카네)은 전자책의 비중이 날로 커지는 게 못마땅하다. 지나친 디지털화가 삶에 끼치는 영향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출판사 실적을 위해 전자책 사업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배우 셀레나(쥘리에트 비노슈)는 예술적 자의식에 목마르면서도 인기에 영합해 작품을 고른다. 소설가 레

오나르(빈센트 맥케인)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듯 글을 쓴다. 무엇보다 앞서 열거한 이들 모두 결혼생활에 애착을 보이면서도 불륜을 저지른다. 체면치레에 바빠 배우자의 외도를 눈치채고도 묵인한다. 현실에서는 변화를 꾀하는 지성인을 자청하면서도 자신에겐 한없이 무디다.

 <논-픽션>을 ‘무엇’에 관한 영화로 특정하긴 어렵다. 디지털과 SNS가 잠식한 삶을 반추하다가 어느새 자리를 옮겨 예술이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논한다. 삶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일상 속에 전시하듯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논-픽션>은 대화의 양상 그 자체를 주요 모티브로 삼는다. 마치 ‘100분 토론’처럼 서로 주장이 아슬아슬하게 부딪쳐 시종일관 흥미를 자아낸다. 가령 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체할 수 있을까.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이 인류에게 이로운 걸까. 소설에서 타인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과연 온전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란 존재할까. 소셜미디어에 적힌 짧은 글이 문학을 대체할 수 있을까. 영화는 시의적인 질문을 쏟아내지만 정작 답을 구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차피 삶은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고 그걸 껴안고 갈 수밖에 없으니까. 외려 인물 간의 갈등을 촉진제 삼아 대화의 질에 공을 들인다. 별다른 기승전결이나 눈에 띄는 사건 없이 오로지 주고받는 대화로 지적 유희를 자아낸다. 물론 거기에 프랑스 지식층의 속물스런 면모를 엿보는 재미는 덤이다.


 우리 삶은 끝없이 변한다. 다가오는 것에 대응하느라 사라지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기술 발전은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로 말미암은 축약은 상실감을 자아낸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무엇을 주고받는지 깨닫지 못한다. 속도전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하지만, 맥락은 거세된 양상이다. 어느새 온 일상은 네트워크가 거미줄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는 사람에 주목한다. <논-픽션>은 테크놀로지가 지닌 양가적  의미를 짚어낸다. 어느 한쪽에서는 지나친 디지털화로 우리 삶이 후퇴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선 오히려 삶 저변이 된 네트워크가 소통의 벽을 허문다고 평한다.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종이책을 찾는 이가 있고, 아날로그는 다시금 취향으로 주목받는다.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현재 과도기는 혼란스럽지만, 그 자체로 좋은 이야깃거리다. 어쩌면 질문에 답을 구하기보다 질문 그 자체가 핵심일지도 모른다. 관성처럼 흘러가는 일과에 제동을 걸고 다시금 삶이 부딪친 모순을 되짚어 볼 때 비로써 디지털 시대도 재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논-픽션>의 가장 큰 재미는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쉼 없이 포개 놓은 대사의 향연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배우들은 마치 어제 술집 한 귀퉁이에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아사야스는 스펙터클이 영화의 모든 게 되어버린 요즘 드물게 영화가 삶에 끼치는 영향을 시험하는 감독이다. <논-픽션>은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였던 전작과 달리 욕망에 충실하고 어느 자리에서건 삶을 되묻는 프랑스적 삶을 코믹한 분위기로 펼쳐놓는다.


퍼스널 쇼퍼 (2016)


 우린 깨어있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세상과 터치한다.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 둥지를 틀고 네트워크를 벗 삼아 침잠한다. 카톡 소리에 아침잠에서 깨고, 멜론이 만들어내는 음악으로 하루 기분을 결정한다. 잠이 들기 전에 응시하는 환한 스마트폰 화면이 꿈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태를 원하지 않았는데 결국엔 이런 상태로 살고 있다. 이제는 희미해진 그가 그리울 때도 회상보다는, 아이클라우드에 새겨진 흔적을 찾아본다. 점점 더 인터넷과 멀어진 순간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샤워하러 옷을 벗고 들어가는 순간 깨닫는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연계성을 끊어내겠구나.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파리에서 값비싼 의상을 관리하는 퍼스널 쇼퍼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모린을 뒤쫓는 카메라는 모린에 들러붙은 외로움과 불안을 비춘다. 석 달 전 하나뿐인 오빠를 잃고, 별다른 친구도 없는 대도시는 삭막한 장소에 불과하다. 모린은 어느 날부터 자신을 죽은 오빠라 자처하는 수상한 놈의 문자를 받는다. 그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잘 아는 수상한 놈은 모린의 시간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세운다.

 요즘 세상은 터치를 위한 터치의 접점인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의 터치에 반응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게 되고, 미처 그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 전에 가능한 터치의 영역들이 화면에 제시된다. 그럼 본능적으로 다음 터치를 향해 간다. 그 터치와 반응의 연쇄작용에서 건져 올린 게 뭔지는 잘 모른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삶은 리얼한 물질세계와 우리가 상상으로 살아가는 추상 세계로 이뤄져 있다”라 말했다. 번지르르한 기술 문명이 포괄하지 못한 삶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거기엔 지워질 권리를 박탈당한 기억의 조각들이 켜켜이 쌓여있을지 모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특히 모바일폰이 지닌 연결 상태에 주목한다. 늘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닌 기기를 늘 곁에 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현대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마치 영매처럼 잊혀 마땅한 기억을 다시 불러들이고, 현실과 다를 바 없이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온라인에 저장된 이미지를 환영처럼 불러들이고, SNS에 남긴 메시지는 지워진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텅 빈 화면을 응시하며 1이 지워지기를 끝도 없이 바란다. 영화는 단절된다는 공포와 단절되지 못할 때 가지는 공허함을 오가며 인간이 지닌 양면의 면모를 짚어낸다. 아마도 <퍼스널 쇼퍼>는 온라인이라는 상태가 지닌 복합적인 관념을 최초로 스크린에 형상화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모린은 며칠간 자신을 따라다니는 목소리를 통해 오빠를 잊는다. 망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모린은 상실의 기분을 구체적인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린 기억과 사람, 그리고 장소와 시간을 떠나보낼 때 어리둥절한 상태에 남겨진다. 그건 속내에 불과한지라 작별의 과정은 요원하다. <퍼스널 쇼퍼>는 익숙한 장르영화처럼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주조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이별엔 위로가 필요하고, 작별엔 어떤 의식적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화면에 피어나는 온갖 이미지에 휘둘리기보단, 지금 내게 일어난 변화를 맞닥뜨리고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죽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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