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영화의 우아한 기품을 계승하는 감독
영화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서른두 살 젊은 나이에 런던의 한 극장 예술감독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고고한 영국 예술계에도 유난히 빛나 보였던 그는 탁월한 연출력을 인정받아 마흔 살 늦깎이로 영화 연출에 입문한다. 이후 그는 로저 미첼, 샘 멘데스를 잇는 영국 연극계가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의 초기작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빌리 엘리어트>, <디 아워스>는 아카데미 감독상에 모두 이름을 올렸고, 무수한 이들이 그의 영화를 자신의 인생작으로 꼽곤 한다. 이 작품들을 통해 스티븐 달드리는 문학작품을 영화 언어로 각색하는 절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극 연출로 다져진 세밀한 인간 심리 묘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늘은 영국 드라마의 우아한 기품을 지닌 스티븐 달드리의 대표작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따라가보자.
디 아워스(2002)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처럼 적막이 가득하다. 감정이 터져 나오는 지점을 최대한 자제한 탓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인, 1923년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로라 그리고 오늘날 뉴욕에 사는 클래리사. 각기 다른 시공간의 세 여성은 한없이 맑은 오후에 각기 다른 고민을 한다. 모든 게 풍족해 보이는 그들은 침대에 모로 누워 한없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흩어진 시간이 무색하게 그들은 미세한 끈으로 연결되어 공명한다.
난 <디 아워스>를 보고 가난을 떠올렸다. 가난했던 시절에 떠났던 사람과 그것을 말로 하지 못해서 앓던 시간이 아른거렸다. 좋은 영화는 때론 지워진 시간을 불러오고, 어느 순간 뜻 모를 위안을 자아낸다. 영화를 끝까지 봐도 세 여인의 환부와 증세를 정확히 알 순 없다. 우리는 그저 하루를 슬쩍 엿본 것뿐이니까. 형언할 수 없는 곳에 자리한 위안이란 문학적이라는 용사의 뜻을 짐작게 한다.
<디 아워스>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지만 말이 대체로 적다. 말을 줄이면 감정은 더 기민해지고, 제스처와 뉘앙스가 거의 모든 걸 설명해낸다. 영화의 세 여인은 곡절을 겪으며 마음을 깨부수고 다시 일으키기를 반복한다. 모든 곡절이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탓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잦아진다. 미사여구는 사라지고 도망칠 구석 하나 없는 한낮이 그녀들에게 쏟아진다. 그럴 때 오직 죽음이 도피처처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든 걸 일거에 소거할 수 있다는 강렬한 매혹이 아른거린다. 누군가는 끝내 부정하겠지만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버지니아가 돌덩이를 앉고 서서히 물에 잠기고, 클래리사의 연인 리처드가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엔 단정한 마침표가 찍혀있다.
“나는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아. 죽음은 커다란 위안이 될 수도 있어. 거기에는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 수도 있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런던 행 기차를 기다리는 버지니아 앞에 선 남편의 얼굴이다. 버지니아의 병세를 걱정해 런던을 떠나 교외까지 이사를 왔는데, 그녀는 아랑곳없이 몰래 그를 떠나려 한다. 기차역에서 가까스로 그녀를 붙잡는 남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작품세계만큼이나 깊고 컴컴한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버지니아는 고통받는 남편에게 별다른 설명도 없이 죽고 싶다고 읊조린다. 무너지는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남편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의 청을 수락한다. 그의 얼굴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가닿을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스며있다. 끝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엔 생의 앙상한 밑천이 드러나 있다.
빌리 엘리어트(2000)
<빌리 엘리어트>는 내가 어린 시절 본 영화다. 빌리를 연기한 ‘제이미 벨’의 탁월한 연기 덕에 소년의 처지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빌리가 자신의 방 침대에서 뛰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레임 바깥으로 솟구칠 정도로 높이 뛴다. 벌건 양 볼을 하고선 환희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치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거침없이 뛴다. 하지만 잠시 후 눈에 돌리면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허름하고 어지러운 집 꼬락서니와 성질머리 고약한 형의 욕설이 난무한다. 소년의 엄마는 일찍이 죽었고, 인자했던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꽉 막힌 현실에 이골이 날 즈음, 무심한 아버지는 권투나 하라며 글러브를 던진다. 주먹을 휘두르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소년은 학교 발레 수업을 염탐하다 딱 걸린다. 운명적인 순간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라는 걸 암시라도 하듯, 화면 가득 뽀얀 파스텔톤 서광이 빌리를 비춘다.
폭력의 시대는 소년을 위로하지 않는다. 특히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어린 시절 빌리처럼 개인의 취향을 무시하는 집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른 됨은 때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강요하고, 믿지 않는 것을 따르게 한다. 그럴 때마다 빌리는 온몸을 비틀고 바닥과 벽을 발바닥으로 두드리며 춤을 춘다. 한껏 끓어오르는 분노를 깨뜨리며 온 동네를 쏘다닌다. 기껏해야 방구석에서 웅크리는 요즘 애들과 달리 두드리고 깨지면서 기어코 끝을 본다. 영화는 마치 위인전처럼 국립 발레단 대표 무용수가 된 빌리를 비추며 막을 내린다. 이런 결말이 작위적이기보단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언제나 실패하는 우리에게 이런 동화 한 편쯤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한창 직장생활을 시작한 서른 즈음 재관람했다. 다시 보니 처음 볼 땐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들어왔다. 한껏 들떠있는 빌리보다는 무거운 어깨를 한 아버지가 눈에 띈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더럼의 작은 마을이다. 우리로 치면 강원도 태백쯤 되려나. 철의 여왕이라 불렸던 대처 시절, 탄광 노동자들의 연대와 투쟁은 영국 역사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산업 사회의 기틀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던 광부 25만 명은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한국 사회의 면면과도 다르지 않은 광경이다. 격렬한 파업 현장을 보면 이 영화가 ‘켄 로치’의 영화가 아닌지 눈을 비비게 된다. 노동자를 박해해서 받아낸 명세서엔 현재의 ‘브렉시트’가 마주한 고민이 담겨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복잡한 사회상을 소년의 일상과 겹쳐놓진 않는다. 소년에겐 아버지가 있었고, 그가 온전히 감내해야 할 무게였을 뿐이다. 소년은 그저 분홍색 토슈즈와 우아한 몸짓으로 낡은 도시를 떠나면 그만이지만, 크리스마스에도 궁상맞게 울던 아버지는 땔감이 없어 어머니가 남긴 피아노를 깨부수며 눈물을 흘린다. 노조위원장인 형은 회사에 굴복하는 아비의 가슴을 때지만, 그는 다시 일하러 간다. 소년이 커가며 후기 산업사회는 저물었고 끼니 걱정은 점차 사라졌다. 시골에서 사라진 청년들은 로큰롤을 들으며 마리화나를 피워도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 영화는 아버지에 무심하다. 어른을 꼰대라 칭하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부성은 먼지 나는 소재다. 개인주의 시대에 혈연이란 어쩐지 심심하다. 가슴에 들끓는 소용돌이를 품은 아들을 위해 마지막 자존심을 포기하는 아버지. 배신자 낙인을 각오하고 일을 하러 버스에 탄 노동자의 속내. 아들은 어렵사리 오디션에 합격하지만, 학비를 위해 다시 탄광에 서야 하는 남자는 내리막에 선다. 영화는 담담하지만 끈질기게 삶에 저항하는 자의 내리깐 시선을 따라간다. <빌리 엘리어트>의 절정은 백조가 된 빌리의 비상이 아니다. 광부들이 정부에 투항하는 날 국립발레단 합격통지서를 받아 든 아비의 침묵이다. 그들은 천천히 하강하여 다시 칠흑과 같은 어둠으로 들어가 오래된 가치를 캐낸다.
빌리를 연기한 ‘제이미 벨’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애틋한 경험이다. 영화 <할람 포>를 통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청년으로 훌륭한 성인식을 치른 그는 <필름스타 인 리버풀>로 성공과 현실의 타협에 분리되는 자아를 연기해 느리지만 도드라지는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다. 제이미 벨에게도 꿈만 같던 20대는 스쳐 지나갔고, 새벽 지게차처럼 덜컹거리는 30대가 찾아왔다. 무대 뒤에서 호흡을 고르는 ‘빌리’의 성장이 뭉클한 만큼, 데뷔작이 달아놓은 꼬리표에 아랑곳없이 머리를 꼿꼿이 세운 체 고유한 리듬을 유지하는 그를 응원한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2009)
이제 막 열다섯이나 됐을까. 열병에 걸린 한 소년이 거리에서 토악질한다.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고역스러운 표정이다. 벽을 짚는 선 모습이 꼭 병든 강아지 같다. 키는 멀대처럼 큰데 구부정한 몸과 앳된 얼굴을 보니 여태 어린 티를 벗지 못했다. 소년은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배수로를 통해 흘러가는 걸 빤히 지켜본다. 그 와중에도 손에 꼭 쥔 책은 비에 다 젖어버렸다. 소년은 겨우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무관심을 미덕으로 여기는 도시답게 누구 하나 소년을 돌보지 않는다. 머쓱해진 소년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마침 검은 코트를 입은 나이 든 여인이 다가온다.
그녀의 집에서 잠시 몸을 뉜 소년은 눈을 뜨자마자 부끄러움에 급히 달아난다. 며칠간 집에서 병마와 싸우다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년은 다시 나이 든 여인을 찾는다. 제 무례함을 깨달았는지 꽃을 사 들고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인다. 늦은 저녁에야 퇴근한 그녀는 소년을 다시 집으로 들인다. 허름한 집에 들어서니 단출한 세간에 낡은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욕실과 주방이 한 공간에 담겨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수줍게 자신을 소개한다. 미하엘, 근처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민망한 인사치레를 한다. 나이 든 여인의 이름은 한나.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는 별 대화도 없이 미하엘을 침대로 이끈다. 서로를 살피던 두 사람은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섹스한다. 이후 매일같이 밀회를 하게 된다. 독특하게도 한나는 늘 관계 전에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가방에 늘 책을 지나고 다니는 미하엘은 저녁만 되면 그녀를 위해 소설을 낭독한다. 마치 의식처럼 낭독과 섹스에 탐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하엘을 떠난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우연히 참관하게 된 재판정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전락한 한나를 마주한다. 열병과 같은 첫사랑과 무책임한 이별의 아픔을 안긴 한나의 몰락을 마주한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법정에서 나치의 조력자라는 죄목으로 추궁을 받던 한나는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때 그녀의 처지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독일이 벌인 전쟁, 혹독한 생활고, 유럽 전역에 퍼진 전염병. 생존이 모든 이념과 가치를 전복한 유럽 대륙에서 그녀는 나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맹목의 사회는 그녀를 생계의 절벽으로 내몰았고, 정부는 전쟁물자 확보가 날로 어려워졌다. 보살펴 줄 가족도 없고, 문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한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권력이라도 맛봤지, 뭘 몰랐던 그녀는 오직 무지한 죄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선다.
한나의 눈빛은 거만하고 상처받은, 길 잃은 고양이처럼 한없이 피곤해 보인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이제 전후 세대의 숙제로, 죄의식의 재물로 법정에 섰다.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한나가 묻지만, 그녀의 눈엔 독일인의 복잡한 심경이 겹쳐진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상사의 지시를 따른다. 일상이 반복되면 어느새 관성처럼 일하는 나를 발견한다. 묻고 따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평온하다. 시대적 사명에 거리로 뛰쳐나와 돌이라도 던지며 저항했던 지난날은 서정시와 함께 사라졌다. 오로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오늘 하루를 대충 수습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한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게 묻는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머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 작품은 무지하다는 것에 관해 말해야 마땅하다. 두 사람의 충동적인 동침은 한나의 도피로 종지부를 찍는다. 가냘팠던 소년은 상실감과 폐허 같은 마음으로 청년기를 통과한다. 그리고 한나가 법정에 나타났을 때 그는 그녀가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전범 세대와 전후 세대를 은유한다. 늘 서로를 마주하지만, 반대편에 서서 묘한 긴장감을 이루는 그들 관계는 독일이 가진 딜레마와 다르지 않다. 봉합할 수 없는 갈등을 지닌 두 세대은 끝내 파열한다. 한나는 뭘 몰라서 비극에 휘말렸고 미하엘은 그녀 세대의 무지함을 심판하고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한 자리에 섰다.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는 은밀한 사랑을 나눴지만, 섹스 외에 모든 소통은 미하엘이 한나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데 그쳤다. 한나는 지속해서 미하엘이 읊는 지성의 산물을 접하며 매료됐다. 한나는 그저 듣는 게 가장 속 편한 사람이다. 한나는 미하엘이 책을 다 읽어주고 나서야 섹스를 허락한다. 그녀는 관계에서 마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다. 그녀가 미하엘에게 글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자존심을 접고 자신도 뭔가를 읽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상황이 지금과 달랐을까.
한나는 성실한 근무태도로 직장에서 사무직으로 승진하지만, 글을 읽어야 하는 자리에 오르자 급히 회사를 떠난다. 자신이 문맹이 밝혀질까 두려워 아무런 말도 없이 미하엘을 버린다. 한나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제 이야기를 하길 겁내는 독일인이 가진 죄의식과 비견할 수 있다. 이는 영화가 명백하게 전범 세대에 날을 세우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류의 인격을 가진, 비상식적인 학살을 저지른 그들의 몽매함에 비수를 꽂는다.
미하엘은 한나가 떠난 이후 평생에 걸친 후유증에 시달렸다. 자신이 그녀를 떠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그는 감정에 무딘 남자가 되어 청년 시절 활기를 잃었다. 전범 세대의 무지함이 전후 세대를 평생 죄의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꼴이다. 스티븐 달드리는 두 남녀의 비극을 통해 인간적으로 한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죄의식은 세대를 타고 전이되고, 미하엘은 평생 감옥에 갇혀 사게 될 그녀를 위해 다시 책을 읽어준다. 슬픔 외에도 타고 흐르는 증오와 원망, 연민을 곁들여서, 설명해내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무거운 책을 펴든다. 결국 고쳐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 모두 그들의 과오를 알고 있다. 속죄는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출소를 앞둔 한나는 미하엘에게 묻는다. “왜 나에게 답장을 쓰지 않았어.” 미하엘은 답하지 않고 되묻는다. “죽은 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느냐.” 미하엘이 가장 묻고 싶었던 건 죄의식의 잔존이다. 미하엘은 궁금했다. 결국 문맹을 벗어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그때 한나의 표정은 미묘하게 실망하는 것처럼 바뀐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뭘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지. 죽은 자들은 여전히 죽어 있을 뿐이야.” 작가는 굳이 이 장면을 넣어서 전후 세대와 전범 세대의 화해를 유예시킨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는 변한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한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끝에 이르러 난 다시 이 문장을 손에 쥔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항변하던 영화는 결국 출구 없이 끝을 맺는다. 어쩌면 원작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이 작품을 쓰며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해받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