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통념을 거절하는 생활인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는 홍상수의 겨울 영화엔 밤거리가 유독 잦다. 코트를 여미고 카페와 고갈비 집을 기웃거리며 낯선 생각을 한다. 그걸 엿보는 재미에 빠져 난 종종 그의 영화를 찾아본다.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서. 통념에서 한 걸음 떨어져 살고 싶어서. 그래서 난 요즘도 영화의 배경이 된 북촌과 종로 일대를 산책한다. 홍상수의 겨울이야기에 머물고파 되풀이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우연히 책을 읽다가 언캐니(uncanny)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흔히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기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예술을 추구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반대의 측면 즉 괴기함,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역시 미학의 범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어느 순간 익숙한 듯 아름다움을 빚어내지만(canny), 또 어느 순간에 마주하면 기이함과 공포가 목까지 차오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언캐니(uncanny)는 내가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대상이 상대적으로 다른 이에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이는 픽사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마치 유아용 교재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 인간의 다섯 가지 주요 감정이 주도권을 놓고 타협하며 한 인간의 의사를 결정한다. 유년의 종말과 성년의 시작은 이 감정들의 타협에서 결정이 된다. 기쁨과 슬픔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때 우린 성장을 논한다. 유년시절엔 그저 앞을 향해 오로지 기쁨의 환희로 돌진하지만, 점차 기억의 영역에서 회한과 후회, 정념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 과정이다. 슬픔을 봉인에서 풀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유년의 종말을 보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을 떠올리며 성장하는 인간에게 첫 경험은 늘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순간 제 모양을 달리하며 예술적 감화로 자리한다.
예술의 독창적인 면모는 그저 천재적인 한 인간의 객기에서 나오는 우연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옛 것을 새롭게 읽어내어 다시 새롭게 맞이하는 작업이다. 예술의 매혹은 그래서 친근함 속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작업처럼 보인다. 프로이트는 아마 이러한 미학의 양면성을 익숙함과 기이한 느낌으로 힘주어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영화감독 홍상수는 그런 의미에서 익숙한 곳에서 기이한 소격성을 보여주는 작가다. 홍상수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사력을 다하지만 번번이 미끄러진다. 말이 적은 청년의 과묵함에 반해 그 주변 사람들이 그의 대해 추측하고 떠벌이는 것처럼 허둥댈 뿐이다. 그의 영화를 볼 때는 흠뻑 취해 있다가, 관람 후 내가 느낀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허둥대는 꼴이다. 난 매번 그의 영화를 분석하는 평론가들의 글을 모조리 읽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백하게 홍상수의 영화를 텍스트로 명징하게 분석해낸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글로 쓰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홍상수가 내게 준 그 아름다운 예술적 영감이 내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과정일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
영희(김민희)는 남자의 연락을 기다린다.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유부남인 그는 지금에 어디에 있을까. 함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지인과 산책을 즐기던 영희는 느닷없이 녹슨 다리 앞에서 절을 올린다. 실연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녀는 그 순간 구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평생 믿지 않았던 존재를 향한 기도엔 무력감이 배어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큰 이야기 얼개 없이 오직 그녀의 기분을 좇기 바쁘다. 그녀의 슬픔, 고독, 분노, 오열, 자조, 체념. 배우 김민희는 너른 감정을 죄다 그러모아서 한 그릇에 담아낸다.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지만 영희 곁엔 늘 다정한 사람들이 함께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강릉의 한 해변까지 영희가 홀로인 시간은 드물다. 지인들은 그녀를 위해 술자리를 열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등을 토닥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도, 함께 술을 마시는 그들도 그녀가 혼자임을 안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쓸쓸함은 떨쳐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고독이다. 짙게 드리운 슬픔이 스크린 위로 팽배하다. 추운 강릉의 어느 커피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영희는 스러질 것처럼 나약하다. 아무리 주변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도 상실을 머금은 이는 일상을 배겨 나기 어렵다. 영희는 지금 겉돌며 간신히 버티고 서있다. 그리움은 통증과 같아서 매 순간이 혹독하다. 여차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고독. 위태로운 걸음과 널뛰는 감정. 영화엔 그녀의 감정만이 오롯하다.
영희는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어려서 공부가 부족했고, 지금은 시간이 지천이니 독서를 해보겠다고 말한다. 난 그녀에게 책이 있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책장을 넘기며 고독으로 말미암은 안식을 얻기를 바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의 한 횟집에서 남자를 마주한 영희는 그에게서 한 권의 책을 선물을 받는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 그는 낭독을 청하는 그녀에게 한 구절을 소리 내 읽는다.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객실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난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내 가슴에 몸을 맡겼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얼굴, 어깨 그리고 젖은 손에 키스할 때, 그때 우리는 정말 불행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고, 사소한 것이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해변에 누워있던 영희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가며 끝난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모래를 털고 걸어가는 그녀는 괜찮아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결연한 의지가 비어져 나오고, 객석에 앉은 나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턱을 치켜든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무던히 춥던 날 함춘수는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GV 행사에 참여하려고 수원으로 향한다. 그는 꽤 심심했던지 하루 일찍 도착해 호텔방을 잡고 화성행궁 근처를 돌아다닌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함춘수는 예술영화 몇 편을 만든 먹물 감독이다. 부가적으로 덧붙이면 여자 같은 사람을 보면 한없이 감동하는 남자다. 커피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행궁 내에 있는 복내당에 들른다. 그는 느닷없이 ‘복내(福內)’란 단어를 상기한다. "일으켜 얻는 것은 밖으로부터 이고, 복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안으로부터다." 그때 햇살이 내리쬐는 평상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윤희정과 마주친다. 정말 복이 생겨난 것일까.
겨울이 오니 눈 오는 수원을 배경으로 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떠오른다. 15년 여름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봤다. 상영관을 나와 이끌리듯 곧장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수원에 가서 행궁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이 머물던 공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발이 날리는 허름한 골목에서 커피를 사 마시며 마음을 녹이는 함춘수와 윤희정을 떠올렸다.
윤희정은 귀여운 여자다. 그녀는 가끔 모델 일을 하지만 주로 그림을 그리며 산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맞는다고 느꼈는지 한껏 들뜬 모양이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눈다. 서로를 알아가니 몸이 스르르 풀린다. 늦은 밤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심취한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희정의 작업실(행궁동 레지던시)에서 시작해 초밥집(이찌마라 스시), 전통찻집(시인과 농부), 수원 팔달산 아래 불상이 눈에 들어오는 희정의 집 앞까지 거닌다. 문득 강원도로 떠나버릴까 고민하던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독특한 건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지금과 ‘그때’와 ‘지금’이 연이어 등장하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보여준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진심이 동할 때 맞아 들어가고, 거짓으로 일관하면 어김없이 틀려먹는다. 그러는 새 과거와 현재가 섞여 들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해진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이 커피 프림처럼 서로에 스며들고, 살을 에는 추위는 달뜬 육체 앞에 누그러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반복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지만, 다시 만나진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수원 여행이 다시 있으리라 믿을 수 없고, 희정이 그 귀여운 얼굴로 서울로 떠난 춘수를 굳이 찾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심도 그 순간뿐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연에 의해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생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에 가깝다. 일상이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찰나에 가까워 견딜만하다. 영화는 현재를 응시하며 통념의 찌꺼기를 털고, 위악과 전형에서 벗어나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나았을까. 고민하고 자책하지만 그건 기억이 만든 회한에 불과하다. 술안주에나 어울리는 주전부리처럼 바삭할 뿐 이내 스러진다. 취해 처자식을 생각하는 춘수와 다른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뜨는 희정은 주저하다 이내 엇갈린다. 어그러진 말들이 장난처럼 오가고, 속내를 감추고 떨쳐낸 사심이 속살처럼 올라올 때 영화는 처연히 사라진다. 혹독한 날씨에도 꽃이 피고 지듯이 인연은 미련을 품고 멀어져 간다. 그게 이 겨울을 견디게끔 한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영화 속 해원은 사흘의 일기장 안에서 등장한다. 해원이는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를 만나고, 유부남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기도 하며, 남한산성에 올라가 쓰린 이별을 맛보기도 한다. 꿈속에서 만난 외국 교수와 결혼을 꿈꾸고, 우주대스타 제인 버킨과 만나 수다를 떤다. 난데없이 제인의 딸 샬롯 갱스부르처럼 살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겠다며 요란을 떠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 일관적이지 못한 에피소드의 나열들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내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내게 어떤 것이 홍상수를 몽상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극장을 찾게 하는 것일까. 왜 그를 쓰고 있을까. 영화 속 꿈과 현실이라는 범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꿈이 현실의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되지 않자, 영화는 해원이가 살아내는 일상을 걸어간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그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입을 뗄 수 없다. 제목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가진 느낌은 자신의 정체가 본인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마는 그녀의 미약한 자의식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수상하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대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 군인가"라는 항변처럼 가련한다.
남자 친구인 성준은 홍상수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속물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어딘가 뻔뻔하고 오버하는 남자.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이 캐릭터는 해원이를 설명하는 가장 큰 단서로 제공된다. 김의성이 연기한 정체 모를 외국 교수 역시 홍상수의 다른 작품 <북촌방향>에 등장했던 베트남에서 사업에 실패한 교수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쉽게 혜원이를 감동시킬 만큼의 정의를 눈앞에 제시하고, 자의식이 약한 그녀의 치부를 공략한다. 또 다른 홍 감독의 전작 <하하하>에 나오기도 했던 선배 불륜커플은 어딘지 모르게 해원이의 미래를 보는 듯 불편하다. 관계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엄마라는 존재 역시 출처가 불분명한 그녀를 보여주고 있다.(고 김자옥 님이 연기한 그녀는 스러져가는 해원이를 구조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이뻐해 준다.) 그녀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처럼 쟤가 그런 애였데...라는 말에 가장 잘 설명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의지와 강인함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과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 그리고 언제나 사랑 앞에서 조연이 되어야 하는 유부남과의 서투른 연예 역시 주변 인물을 통해 각주로 처리되는 그녀를 보여준다.
나는 이 불분명한 해원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어딘지 알 수 없는 쓸쓸함과 공포스러움을 느꼈다. 삶을 살아낼수록 스러져가는 이 미약한 청춘의 존재감이 무척 슬프게 느껴졌다. 키득키득 재밌게도 보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처연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당혹감과 패배감이다. 나를 찾는 인생이 아닌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인간. 시간이 흘러 나를 설명할 때 누군가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미약한 청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을 배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말할 때는 아무런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현재 한국에서 불어오는 지친 이들을 위한 각종 자기 개발서와 젊음을 등쳐먹는 멘토들의 등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을 통해 정의하려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해원은 어쩌면 홍상수가 정의한 이 시대의 아류다.
우리 선희(2013)
지난 주말엔 창경궁을 걸어봤다. 경복궁을 수없이 걸어봤지만 창경궁은 처음이었다. 경복궁에 비해 사람이 적어서인지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기가 좋다. 점점 무르익어가는 단풍과 갈등의 찌꺼기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고적한 시간들이 있다. 다소 덥기는 했지만 한적함을 선물 받았다. 궁궐은 내게 순수하게 어떤 목적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창경궁을 걸으며 영화 <우리 선희>의 등장인물인 문수, 재학, 최 교수가 두리번거리던 공간들을 찾아가 봤다. 그리고 궁을 나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주요 공간인 아리랑 카페, 공드리 커피집, 재학이 살던 북촌의 빌라, 골목길의 모습까지 직접 걸어보았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북촌을 헤매다 보니 난 홍상수의 영화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홍상수의 전작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개봉했을 때도 배경인 서촌 마을에서 여자 친구와 땀을 뻘뻘 흘리며 걷던 기억도 났다. 사직단에서 영화 속 해원이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커도 너무 큰 동상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북촌방향>에 나오는 고갈비 집에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셨고, 다정이라는 한정식집에 혼자 찾아가 비싼 돈 주고 점심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극장전>, <자유의 언덕>도 마찬가지다. 난 홍상수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종로, 건대, 수원까지 직접 체험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산책을 부르는 마스터의 신호가 있고, 난 그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순간들이 그리워 옥희와 해원이를 찾아 길을 헤맸다.
이런 체험들의 욕구는 아마도 홍상수가 선물하는 일상의 빈틈 때문일 것이다. 우리 선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내 앞에 앉아있는 당신이다.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술자리 신에는 당신의 얼굴을 부여잡고 무언가 통하길 바라는 강렬한 의지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것을 쉽게 정의해내려는 불필요한 말들의 천착은 분명 고통스럽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 답답한 순간을 리얼하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유사성으로 묶어내며 처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제목 <우리 선희>가 주는 중의적 뉘앙스처럼 정의되지 않는 이물감이 서로의 대화에 막을 친다. 선희라는 여성을 정의하는 남자들(최교수, 문수, 재학)과 자신을 규정하는 그 말들을 훌쩍훌쩍 뛰어다니는 선희의 태도는 이 불통의 도돌이표다. 그래서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헤매고, 소화되지 않은 이물감을 제거하려 술을 마신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그렇게 일상의 유사성으로 우리를 이끌고,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늘 함께 있었던 삶의 조각들에 한껏 취해 영화관을 빠져나오게 한다.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가을볕을 즐기는 최 교수의 모습, 명정전을 올라서는 세 남자의 엉거주춤한 상념들, 카페 아리랑에서 무언가를 계속 파내는 문수의 손동작과 뒤도 돌아보지 앉고 재학을 떠나는 선희의 단호한 발걸음까지 모두 정겹다. 난 그런 모습에 위로받는다. 정의하기 힘들었던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그냥 다가와 곁에 앉는다.
홍상수의 영화는 좀 심심하지만, 마음이 맑아지는 구석이 있어서 계속 찾게 된다. 별다를 게 없는 잔잔한 일상이지만 깨끗한 뭔가를 얻어가는 기분이다. 의미나 상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의도가 과녁에 꽂히는 걸 볼 수 있다. 어떤 메시지를 주겠다고 극적인 장면을 삽입하거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서 인물을 구해내겠다는 위력이 없다. 편의적으로 현상을 해석하거나 손쉽게 결론짓지 않는다는 게 내겐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섣부른 치기와 더러운 생각들은 하수구로 흘러가고, 난 작고 느슨한 세계에서 전 숨통을 틔고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