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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9. 2016

레이먼드 카버

작고 좋은 것들이 가득한 세계

 내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을 사랑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점심 먹고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숨죽이고 읽는 카버의 단편 몇 장은 하루에 숨 돌릴 여유를 준다. 유독 그의 스타일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짧은 호흡의 문장과 큰 사건이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발견한 요사스러운 감정이 지금 내 일상을 뒤트는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내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분명히 뭔가 감지하지 못한 이상 징후가 있을 것에 마음이 쓰인다. 


 레이먼드 카버는 작가 생활 초기부터 생활고에 시달렸다. 평생 글을 썼지만 장편 소설은 집필하지 못했다. 이른 결혼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단편을 써서 돈을 빠르게 수급하기 급급했다. 그에게 글은 밥벌이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전쟁과 같았다. 카버는 저녁 무렵 집을 벗어나고 싶을 땐 자신의 허름한 폭스바겐 운전석에 앉아 무릎 위에 공책을 대고 글을 썼다. 그래서일까 카버는 꽤 긴 시간 술을 달고 살았다. 마당에 널려 있는 술병과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빠져들지 모르는 운명. 그는 결국 첫 아내와 이혼한 후에야 생활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을 읽으며 작가를 자신을 의식하지 않기란 어렵다. 작중 화자 대부분이 이혼했거나, 알코올 중독자며 실직을 당해 우울한 처지기 때문이다. 삶을 살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변화구가 날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린 최대한 몸을 구부리며 그 시간을 버텨낸다. 별수 없이 비탈에 몰려 허리춤을 짚고 서서 참아보는 거다. 위안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기엔 가혹한 시간, 레이먼드 카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적는 사람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현실이지만 뭐라도 붙잡고 힘을 내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나며 나지막이 말문을 연다.


 수록작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화자다. 삶이 일제히 무너지는 시간, 괴상한 전화가 빗발친다. 경황이 없던 부부는 며칠 전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까맣게 잊은 참이다. 빵집 주인은 별다른 말 없이 무례한 말투로 화를 내고 전화를 끊는다. 되풀이되는 전화벨 소리에 부부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끝내 화를 참지 못한다. 부부는 노기를 띠며 가게로 쳐들어가고, 영문을 모르는 빵집 주인은 겨우 사태를 파악하곤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컵을 찾아 전기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랐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듯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듯하고 달콤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카버가 오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낸 단편집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 이야기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숏컷(Short Cuts, 1993)이란 영화에 가져다 쓰기도 했다. 또한 카버의 광팬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란 에세이에 인용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인물들은 조용한 오후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가로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부부간의 대화는 레이먼드가 카버가 통속에 찌든 인간을 보여주는 데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구도다. 간간히 끼어드는 유머와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를 통해 슬그머니 삶의 구김이 드러난다. 그 주름 사이사이에 끼여 있던 사랑의 상처와 이기심, 진실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든다. 이제 대화거리도 다 떨어지고 아무 일 없었던 양 다시 일어서지만 대화를 시작하기 전과 지금은 무척 다르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글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더욱 의심이 가는 그런 순간들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카버는 오랜 생활고와 방탕한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테스 갤러거가 그를 안락한 삶으로 이끌었고, 대학교수라는 직함과 꿈에 그리던 벤츠를 사서 성공한 인생을 가꾸었다. 말 그대로 그는 추락한 자의 위치에서 다시 비상한 것이다. 리건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만들며 카버의 비상을 떠올렸을까. 약물과 술을 멀리하고, 그를 옥죄는 가족이라는 사슬을 벗어나 새로운 사랑과 부를 얻었던 카버의 외적인 삶이 그를 자극했던 걸까. 


 늘 작품에서 실패한 자의 처진 어깨를 그려내는 카버의 단편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언제나 내 주변에 있던 이상 징후로 인해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사물의 비밀을 밝혀지듯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에 기대어 오늘 하루를 버텨낸다. 겉보기엔 별것 아닌 것들의 물성이 누군가에겐 오늘을 위로하는 한 잔의 럼주인 샘이다. 견디다 못해 무대를 뛰쳐나온 리건이 거리를 활강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모든 추락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과 실패를 인정해버린 사람의 가벼움이 날개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해법 안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꽤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보이지만, 난 데 없는 기계 신의 구원과 같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 <풋내기들>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됐다. 1981년, 당시 크노프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고든 리시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편집 과정에서 카버의 원고를 거의 갈아엎는 수준으로 바꿨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결국 카버의 소설이 카버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그건 그의 최고작이라고 불리는 <대성당>과 그의 전작들이 가진 간극에서 그 의심을 북돋는다. 

급하게 찾아서 읽어 본 <풋내기들>은 결과적으로 좀 더 감상적이고, 후회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풋내기들은 확실히 당시 몰락 끝 새로운 인생을 갈망했던 카버의 희망이 깊숙이 반영된 작품으로 보였다. 결론적으로 내게 <풋내기들>은 카버의 문학이 다다르기 위한 일종의 도움닫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간에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끼어있다. 모두 카버가 감내한 삶이 진득하게 배어있다. <풋내기들>엔 진정 카버가 원했던 것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야심으로 주조된 기성 상품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편집자의 영향력이 많은 것을 뒤틀어놓은 것이다. 당시 그는 편집자의 출간본을 보고 편지를 썼다. 

“책이 그렇게 출간된다면 나는 거꾸러지고 말 겁니다. 어쩌면 그게 문학적으로 원래보다 더 나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50년 후에도 그걸 읽게 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나를 죽게 만들 겁니다. 정말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나와 너무나 깊이 연결돼 있어요. 내가 나아진 것, 회복된 것, 자부심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치 있다고 느끼게 된 것에 깊이 연결돼 있어요.” 

 처참히 수정된 원고를 보며 그는 이것이 자신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단편집 중 하나가 되었고, 예상한 결과와는 정 반대가 되었다. 부와 명예를 획득한 후 카버는 과거의 말을 번복하고 고든 리시를 최고의 편집자로 추켜세웠다. 레이먼드 카버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재미있는 스캔들이다. 


 난 문학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소설을 통해 뭔가 대단한 걸 깨달았다는 과장은 질색이다. 음습한 일상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내게 문학은 변기에 앉아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자정 무렵 침대에 기대 잠을 청하는 용도가 다다. 소설은 종종 독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순간뿐이고 켜켜이 쌓인 일과엔 낭만이 깃들 새가 없다. 문학의 가치를 부풀리는 순간 그 길로 가짜가 되고 만다. 레이먼드 카버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 후 침대에 누워서 제인 그레이의 책을 읽던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좁은 집구석에서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평온을 맛보던 중년 남자의 사적인 시간을 그려본다. 그것이 카버에게 독서가 주는 위안이었다. 그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건네는 갓 구운 롤빵과 같고, 별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망자는 돌아올 리 없고,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쉬이 낫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으로선 서로를 마주하고 먹는 따듯한 롤빵 하나가 전부다. 그 순간 잠시나마 바람이 옷을 적실 때처럼 한결 마음이 느슨해진다. 풍향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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