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글쓰기처럼 위트있게
오늘 카페에 앉아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1권을 더디게 읽기 시작했다. 마의 백 페이지를 넘어서면서 이야기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미국 뉴저지를 배경으로 어느 안락한 중산층 가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중이었다. 문장의 밀도가 어찌나 촘촘한지 질식할 것 같았다. 어제오늘이 연휴가 아니었다면 초반에 지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끈덕지게 대가 '필립 로스'의 어두컴컴한 세계를 잘 버텨냈고, 이제 막 궤도에 올라타 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쾌락 독서가 아닌 허영으로의 책 읽기가 통하는 순간이다. 여행으로 치면 공항에서 수속을 다 밟고 게이트를 통과해 뉴욕행 항공기에 앉아 막 이륙하려는 참이었다. 그 비싼 티켓아 아깝지 않은 참된 여행이기를.
한창 재밌게 읽는데 내 앞자리에 앉은 청년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똥색 스웨이드 자켓을 입고 코코넛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고 있었다. '어 나도 저 책 있는데.' 최근 시작한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읽어보려고 구매했지만, 결국엔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을 택해서 아직 못 본 책이었다. 청년 곁에는 손바닥만 한 수첩이 보였는데, 책을 읽다가 밑줄을 치고는 틈틈이 뭔가를 메모했다. 벌어진 수첩 틈새로 자그마한 글자들이 빼곡했다. 어떤 글을 쓰는 걸까. 어떤 말들을 하고 있을까. 난 청년의 문장들이 무척 궁금해졌다. 마거릿 'At Wood'라는 이름처럼 이 도시와는 멀찍이 떨어진 어떤 목가적인 자연주의 소설은 아닐까. 난 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미루어 짐작했다. 잔소리하는 부모님을 배신하는 본능과 욕망을 따르는 이야기. 허물어져 가는, 낡고, 퇴폐하고, 어둡고, 쓸쓸한 도깨비 굴 같은 그런 광경들. 나도 16살 땐 그랬잖아. 다 박살 냈잖아. 적어도 <미국의 목가>를 쓴 필립 로스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온 딸이 반전 구호를 외치다가 분을 못 이겨서 동네 우체국에 폭탄테러를 감행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겠지.
최근에 읽은 <쓰기의 감각>의 원제는 'bird by bird'다. 이런 제목이 붙은 사연이 재밌다. 앤 라모트는 어릴 적에 오빠가 새에 관한 리포트를 쓰는 걸 구경했다. 근데 도무지 풀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때 신문을 읽던 아버지가 다가와서 말했다. 얘야 걱정할 거 없어, 한 마리씩 차근차근 잡으면 된단다. 아버지의 조언치곤 무책임하지만, 앤 라모트는 이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커서 글쓰기 코치가 된 라모트는 'bird by bird'라는 구호를 수업에 써먹기 시작한다. 글쓰기도 새를 잡는 포수처럼 한 마리 한 마리씩 죽이면 된다는 말로 학생들을 독려했다. 말 그대로 어려운 소설도 처음 백 페이지를 꾹 참아내면 이륙할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도 처음 소재를 발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쓸 수 있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쓰기의 감각>을 읽고 사냥꾼이 된 마음으로 '빈 문서 1.hwp'를 열었지만 난 백지 위에 겨우 불평불만만 쏟아냈다. '오늘 스타벅스에서 내 옆에 앉은 거구는 혼자 테이블을 쓰려고 작정을 했는지 가져온 책으로 남한산성을 세워놨다. 나를 오랑캐라도 된다는 듯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치고 십 분에 한 번씩 나를 흘겨본다. 적진에 선 나는 그를 혐오하며 버텨보다가 패잔병처럼 다른 테이블로 도망쳤다.'
아무튼 앤 라모트는 <쓰기의 감각>을 통해 나처럼 글쓰기에 열의를 갖고 있지만, 막상 노트북만 켜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풋내기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서두를 거 없다고, 다들 그렇게 노트북에 이마를 찧어가며 쓴다며, 몇 권의 책을 낸 자신도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위로한다. 그렇다. 상대적인 위로다. 저 프로 작가도 애를 먹는데 내가 뭐라고 영감 운운하나. 그렇다고 <쓰기의 감각>이 무슨 자기계발서처럼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책은 아니다. <10년 안에 10억 벌기> 같은 뜬구름 잡는 실용서 흉내 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헛된 희망을 경계하고 글쓰기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엉덩이가 뜨거워질 때까지 써보라 조언한다. 일상다반사에서 소재를 발굴하고, 인생을 다 털어먹더라도 내 얘기를 적어보라고 부추긴다. 오히려 글쓰기가 주는 최대의 보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무책임한 결론까지 내린다. 열심히 써서 출판해도 누가 알아줄 확률은 더 희박하다고 쐐기를 박는다. (가슴이 아려오네) 난 이 대목에서 작가 필립 로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앞으로 소설 읽기가 컬트적인 행위가 될 것이며 문학은 영화나 텔레비전, 컴퓨터 스크린과 경쟁하지 못할 거라고 잘라 말했다. 평생 소설을 쓰신 분이 소설의 죽음을 예고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앞으로 사라질 작품을 위해 평생을 써왔단 말인가. 난 책을 덮고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허공을 쳐다봤다. '그렇단 말이지.'
사실 글쓰기 비법보다는 앤 라모트라는 작가의 유머러스함이 부러웠다. 딱딱한 글쓰기 책도 유머를 탑재하면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을 얹은 것처럼 중화된다.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유머가 중요한 세상을 살고 있다. 어릴 때야 종일 비관적인 소리만 늘어놓아도 제멋에 취해 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염세적인 비관론자는 술자리에서마저 환영받지 못한다. 이제 내 삶에 유머는 미덕이 아니라 삶의 핵심이자 불가결한 요소다. 아재 개그라고 비난받아도 열 개 치면 두 개는 통한다. 앤 라모트는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글에 활기를 불어넣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작가다. 내가 고작 2할 타자라면 그는 4할을 훌쩍 넘는 테드 윌리엄스급 교타자였다.
이 책에 담긴 또 다른 배움이 있다면, 글쓰기엔 대충이 없다는 사실이다. 초고를 작성하고 얼렁뚱땅 브런치에 올리면 구독자가 떨어져 나간다. 내 초고는 너무 조잡하고, 인천에서 산 중고 침수차처럼 손봐야 할 곳투성이다. 어쩔 땐 다 때려치우고 유튜브를 틀고 싶지만 난 인정 투쟁의 장에서 물러설 마음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집 앞 카페에 앉아 새를 한 마리씩 사냥하고 있다. 백스페이스가 닳아 빠질 때까지 빵이야 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