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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24. 2016

신정아는 어떻게 자신을 드러냈나

영화 <마이 플레이스> My Place 2013, 신정아 <4001>

블로그에 거의 글만 쓰는데도 일기를 쓰진 않는다. 누구는 새해가 되면 일기장을 사서 매일 쓰리라 다짐하는 모양이던데, 나는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매일 하나씩 써야 한다는 부담이 싫거니와 그런 마음을 먹어봤자 잘 써질 리가 없다. 글이란 게 ‘아 뭔가를 쓰고 싶다’고 마음이 먹었을 때 쓰는 글과 ‘아 써야 하는데’라고 시작하는 글은 서두부터 다르다.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첫 문장부터 힘이 넘친다. '자자 읽어봐' 눈가를 재촉하는 맘이다. 과거에 글을 잘 쓰고 싶어 숙제처럼 매일 일기를 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내일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라면 적었던 일기는 곱씹을수록 내 마음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지리멸렬한 일상 뭐 뒤돌아 볼 것이 있는 걸까. 내 일상은 매일 그렇게 기록하고 싶은 멋진 스케치가 아니다.

영화 <우리 선희> 의 영화감독 '재학'은 북촌 한 작은 방에서 시나리오 집필에 짓이겨 있다. 그리고 불청객이 찾아온다.

애써 잘 될 거라며 웃픈 농담을 지껄이는 성격도 되지 못한다. 단조롭고 심심한 글을 앞에 두고 이 나지막한 저녁 밤이 아름다울 리 없다. 차라리 근사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 한 장 더 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길 기다리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화 블로그만은 꾸준하게 운영하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내 일상을 심심함의 바다에서 건져 올리려는 안간힘이다. 블로그는 영화와 일상과의 접점에서 작게나마 구원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다가가지 못했던 삶의 영역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연출자의 마음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이 읽는다는 가정을 두고 쓰는 글이기에 글의 품질에 신경을 쓰게 된다. 나를 다독이고, 나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문장을 다듬는다. 읽는 사람의 영감이 조금이라도 꿈틀댈 수 있도록 잔잔한 강에 언어를 조탁해 던져본다.


일기와 블로그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주인공이냐 조연이냐의 차이인 것 같다. 블로그는 영화와 문학이라는 주인공을 앞에 두고 뒤에서 까는 호박씨와 같다. 아닌 척하며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스리슬쩍 내 일상을 포개어놓는다. 하지만 일기는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이 에세이든 일기장이든 내 자의식을 통제해야만 하는 글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미니홈피에 자조 섞인 일기들은 내가 아닌 남이라면 모두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통제하지 못한 자의식만큼 흉물은 없다. 그래서 난 SNS를 거부한다. 몇 달 전에 신정아의 <4001>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2007년 큐레이터라는 낯선 직업을 가진 한 싱글여성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학력위조와 정치권 스캔들, 누드사진과 언론조작까지 신정아라는 여성의 삶이 자극적인 기사에 도배됐다. 이제 신정아라고 하면 '그게 누구야'라고 묻는다. 당시엔 <4001>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엔 가십을 돈으로 사기 싫어 피했던 그녀의 사생활이 갑자기 읽고 싶어 졌다.

신정아 에세이 4001 중

신정아는 <4001>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한 편의 소설로 각색하여 독자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누구나 궁금했던 교수 채용 특혜와 학위 취득과정의 비리, 정치권 인사와의 스캔들까지 가감 없이 고백한다. 매끈한 문장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자신을 포장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그녀의 포장술이 아니다. 그녀의 매끄러운 글 솜씨다. 잘 모르겠다, 신정아라는 여성이 정말 이 글을 스스로 혼자 집필했을지. 글 솜씨가 정말 뛰어나다. 누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신정아를 동정하고 최소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자의식으로 가득 찬 글이지만 적정 선까지 자신을 변호하고 팩트로 드러난 지점은 가감 없이 인정해 버린다. 정제된 언어의 조탁력과 기름기를 뺀 문장들이 한 인간의 겉과 속을 유연하게 포개어놓는다.

글이란 곧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신정아는 이 한편의 인생 소설을 통해 독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더러운 과거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보이게끔 했다. 난 <4001>을 읽으며 그녀의 죄가 가진 중량을 떠나 글이 가진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마이 플레이스 My Place, 2013

신정아의 에세이와 비슷한 예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가족처럼 내밀한 영역을 다룬 영화 <마이 플레이스>는 <4001>과 유사한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역이민 온 한 가족은 한국사의 굴곡진 흐름 안에 비집고 들어와 생존해있다. 강인한 아버지와 태연한 어머니 그리고 감독 지망생 본인 그리고 여동생이 있다. 영화는 감상에 머무르는 대신 고르고 촘촘하게 문제를 짚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자의식이 만연한 작품에서 주의할 지점은 바로 거리감이다. 가족이라는 우주를 마치 천체 망원경으로 보듯 냉철하게 중계해야 한다. 이 사적인 기록은 그 거리감에서 흥미로운 드라마를 잡아내어 사회적 의제까지 던지며 끝이 난다.

<마이 플레이스>는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가족 중에서도 자신을 뺀 동생의 인생을 다룬 다큐다. 평범하길 원치 않는 동생은 누구나 말리는 출산과 양육을 어린 나이에 시작한다. 그곳에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지상낙원을 꾸미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행복한 거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가정에서 자란 감독은 자신의 동생을 성실히 관찰하여 개인의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가족 이야기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글쓰기의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이 플레이스>는 성실하게 관찰하면 억지로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않고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순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난 언제쯤 내 글을 통해 타인의 심장에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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