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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07. 2017

걷는 듯 천천히

영화/소설 <행복한 사전>,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난 성격이 조급해서 운전하거나 밥을 먹을 때 조바심을 낸다. 낭비라 생각되는 시간들을 어떻게든 빨리 지우려는 욕구가 밥숟갈을 들고서도 멈추지 않는다. 난 밥 먹을 때 되도록 후딱 먹어치운다. 물론 고급 레스토랑이나 예의를 지켜야 하는 자리는 예외다. 하지만 매일 사무실에서 맞이하는 점심시간엔 거침이 없이 목구멍을 넘긴다. 덮밥이나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이유도 빠르게 내 것만 먹어치울 수 있는 간편함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먹는 속도가 빠르다. 천천히 식사를 즐기는 분들에게 내 섭취 속도는 야만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난 운전하는 시간도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지하철을 선호한다. 지하철 내에서는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생각도 자유롭다. 하지만 운전할 땐 신경이 곤두서고 조급해진다. 이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차선 변경과 과속을 일삼는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되도록 즐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무언가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여겨지는 행위에는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다. 


요즘엔 이야기마저도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난 한국 독립영화를 좋아해서 영화관에서의 시간만큼은 아끼지 않는 사람인데, 최근엔 극의 흐름이 더딘 이야기를 점점 더 고역스러워한다. 과거에 더딘 숨결의 영화는 생각의 공란을 위한 미적 장치로 생각했는데, 최근엔 극 사이의 뜸마저도 몰입하지 못한다. 짐시 딴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선 이후의 스케줄을 생각한다. 가끔 이런 내가 너무나 싫어질 때가 있다.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을 넘겨야 하는지 가치판단이 잘못된 것인지, 인생을 낭비하고 살아서 더 이상 무언가에 지출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는데 난 나를 다독이며 묻고 싶어 진다.

소설 배를 엮다

얼마 전 읽은 소설 <배를 엮다>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행복한 사전>은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영화였다. 호흡이 길고, 대사가 느릿느릿하다. 소설 중에서도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내게 용납할 수 없는 긴 호흡을 가진 이야기였다. 영화의 소재 자체가 사전을 편찬하는 부서의 이야기인데, 이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딱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끈기 있게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는 작업을 신중하게 실수하지 않고 단어를 찾고, 용례집을 만들고, 수정사항을 파악하여 수년 동안 작업해야만 사전을 만들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마츠다 류헤이(지루하게 생긴 배우)가 연기한 마지메라는 남자는 은둔형에 기인으로 꼽히는 남자다. 일본의 한 대형 출판사의 영업부서에서 일하는 마지메는 느릿느릿하고 성격답게 시간이 곧 돈인 부서의 특성상 능력 없는 놈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성격을 눈치 첸 사전 편찬부의 마사시는 그를 스카우트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대도해’라는 이름의 국어사전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이야기는 도시에서 느린 데다가 사회성 부족한 녀석이 겪는 일종의 모험담이다. 그는 단어의 바다 안에서 모두들 익사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대도해를 이끌고 순항한다. 장장 15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연출 자체도 서두름이 없다. 행복한 사전은 멀티태스킹도 잘 하지 못한다. 요즘 영화 대부분이 몇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여 관객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행복한 사전은 이야기를 하나씩 진행시킨다. 마치 사전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절차라도 되는 것처럼, 부서의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사연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그 흔한 교차편집도 없고, 시간을 건너뛰는 영화적인 기법도 없다. 나른한 류헤이는 연애와 결혼마저도 더딘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재촉하지 않는다. 외향적이고 화려한 동료 마사시가 부서를 그만두고, 다른 부서로 가는 과정까지 지나고 나면 위기가 찾아오지만 그마저도 전혀 긴박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고비를 넘겨 대도해는 이렇게 2010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공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난 이 더딘 진행에 좀이 쑤셨지만, 어쩐지 모르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푸근하고 개운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영화 중에 이처럼 모든 절차를 밟고 나서 영화의 결론을 말끔하게 지었던 적이 있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이란 독특하고 고루한 작업에 대한 애정과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원작 소설의 설정들을 하나씩 붙잡아서 매듭짓고 가는 그 꼼꼼함이 내 동경심을 자극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를 찾다가 침대에 누워 그 옆의 단어를 읽어보고, 어느새 몇 장씩 읽어 내리며 용례를 파악하고, 모르는 단어에 밑줄 그어놓는 것이 재밌었다. 하지만 요즘엔 포털사이트가 사전을 대신하다 보니 사전을 보는 경우가 없다. 시대의 속도전에 내가 부합해서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정말 우리는 딱 원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있는 것일까. 부차적인 것이 주는 의미는 과연 버려 마땅한 자투리일까. 난 요즘 인생의 과업을 선택할 때 많은 것이 헷갈려 주저한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고루하고, 내 생각대로 하기엔 내가 배운 게 없다. 선택을 못하고 주저앉은 나의 조급증은 나을 기색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가 출간됐다. <걷는 듯 천천히>라는 제목의 얇은 책이다. 생각보다 비싸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걷는 듯' 오랫동안 쓴 글을 너무 빨리 읽어 조금 켕겼지만, 그의 영화답게 글 역시 편안하고 물 흐르듯 유려했다. 그의 글은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화려한 문장은 아니지만, 정확한 단어로 삶의 형태를 그리는 솜씨가 있다. 어쩐지 행복한 사전의 마에다가 현실세계에 쓴 일기장처럼 보였다. 쉽게 재단하지 않고, 예술이 삶에 천착되는 과정에 대한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쩐지 영화나 글에서조차 수줍고 주저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렇다. 그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 부쩍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반작용 같은 거다. 이 속도전의 일상에서 내가 침대에서 책에서 만큼은 서두르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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