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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15. 2017

'에스피오나지'의 장인들

007 스카이폴 SKYFALL 그리고 작가 '존 르카레'의 작품

최근 내가 빠져있는 ‘존 르카레’라는 작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이 이름이 익숙한 분이라면 스파이 소설이나 그에 파생된 에스피오나지 장르에 대해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는 분 것이다. 난 존 르카레를 모르고 20년 넘게 살아왔다. 정말 통탄할 노릇인 게 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영국 정보부의 삶이 내가 매혹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은둔자들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를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늦게 만난 내 님을 만난 듯 이 고독한 남자들의 세계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말로 꺼내기보단 깊게 침잠하여 숙고하는 기품과, 내가 언제나 동경해왔던 행동뿐인 진실의 실체를 목격하는 중이다.

존 르카레는 영국의 냉전시대에 정보부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작가다. 그는 실제 스파이로 활동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하는데, 그는 한 번도 긍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그가 내세우는 구체적인 설정들이 너무 농밀하고, 집요해 누구나 아 이 양반 스파이였구만 하게 될 만큼 강력한 스토리텔링으로 극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아래 사진들은 존 르카레가 쓴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최근 영화들이다. (더스틴 호프먼의 열연이 돋보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좌),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유작인 '모스트 원티드 맨'(우))

존 르카레의 작품에 긴박한 첩보활동의 현장감은 없다. 이것이 그의 작품을 향한 취향 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에스피오나지 장르라고 하면 보통 '007 시리즈'와 같은 첩보전을 생각하게 된다. 존 르카레의 작품에서는 첩보라는 활동은 이미 일어난 후의 역사일 뿐이다. 정작 관심을 두는 지점은 냉전시대가 주는 건조한 공기 안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정보부원들의 처량함이다. 그 적막한 공기는 사건이 지나간 후의 꿉꿉한 물기와도 같다. 만질라 치면 증발해버리는 스파이들의 감정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에서도 존 르카레가 자의식을 투영하여 만들어낸 중년의 퇴물 정보부원 '스마일리'(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비롯한 여러 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노쇠한 영국 정보부원)에 대한 복잡한 심상은 조직에 대한 그리움과 지나온 인생의 연민이 잔뜩 묻은 불균질 한 자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마일리 3부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나이가 먹어 똥배가 나오고 외도하는 아내를 붙잡지 못하는 서글픈 신세지만, 옥스퍼드 출신의 장래가 촉망받던 시절부터 정보부원으로 살아왔다는 자존감만이 스마일리를 버틸 수 있게 한다. 정년퇴직을 앞둔 스마일리는 정보원으로 삶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늘 어둠의 영역에서 영국을 위해 일해 온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고민한다. 정보부원의 특성상 자신의 인생이 남에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 단 몇 분 만에 도로에 세워둔 차의 번호판을 모두 외워버릴 정도로 몸에 배어버린 직업적 습관들이 그를 평범한 중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한 조직이 개인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흔이 끝까지 남아 스마일리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며 퇴락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은퇴 후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스마일리 3부작, 존 르카레 저

이처럼 스마일리는 첩보원이라는 존재감보다 한 분야에 모든 것을 바친 직업인의 말년에 대한 인생 소회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일리 3부작의 가장 큰 재미가 사무실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행위와 행정절차의 미진함에 따른 파급효과들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점은 소설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사실이다. 스마일리의 앞에는 늘 미심쩍은 사건이 발생한다. 형사 콜롬보가 가는 곳이면 늘 살인사건이 생기는 것처럼, 배신과 음모 그리고 살인과 두더지라 불리는 이중스파이가 존재한다. 평소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정보부의 고위관리들은 이제 그만두고 집에서 수영이나 하며 쉬려고 하는 그를 자꾸만 불러내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스파이의 이중 공작을 찾아내게끔 한다. 그의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한 추리는 사무실 내 권력구도에 의해 좌우되는 조직의 구태의연함을 비판하고, 현실세계에서 첩보원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 흔한 총 한 발, 스파이 장르 특유의 첩보전 없이도 매사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냉전시대의 정보조직 자체가 개인의 탐욕과 황폐한 정신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스마일리는 그들 앞에 우두커니 서서 개인의 신념과 조직의 이득 사이에서 장고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첩보원의 몫이 아니기에, 소설을 읽는 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스마일리를 응원하게 한다.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요즘엔 첩보영화들 역시 스마일리처럼 뒤를 돌아보기 바쁜 모양이다. 간지의 상징인 007 시리즈의 가장 최근 작품인 <007 스카이폴>의 경우 2013년의 제임스 본드는 육체는 노쇠했고, 적들은 첨단기기들을 앞세워 발로 뛰는 본드를 비웃는다. 이 영화에 명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실바는 영국 정보부에 의해 살인기계로 자랐지만, 결국 시대가 흘러 퇴물이 된 어쩌면 본드의 선배 격의 남자다. 그는 정보부에 의해 처참하게 버려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고, 시대의 살인 병기가 되어 본드를 압박한다. 그는 짓이겨진 자아(얼굴)를 쇠로 보정하고, 최첨단의 무기라는 연료를 넣어 자신을 기계화시킨다. 시대가 첩보원들을 등한시하는 사이에 그들은 더 진화된 살인 병기가 된다. 어쩌면 본드의 미래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실바는 본드에게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캐릭터다. 이제 액션보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늙은 본드는 적과의 전면전을 포기해야 할 만큼 위기에 몰리고, 결국 과거에 자랐던 시골마을로 도피하기에 이른다. 어쩌다 비 맞는 강아지 신세가 된 본드 그리고 실바의 공격 목표이자 정보부의 상징인 M, 두 사람은 시골마을에서 실바와의 일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스카이 폴은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작하여 붕괴되는 정보부의 이미지와 더 이상 육체의 힘으로 장악이 되지 않는 시대에 본드가 겪게 되는 아픔까지 고스란히 묘사한다. 21세기의 스파이 제임스 본에게 완전히 밀려버린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며 새로운 수장을 맞아들이는 '스카이 폴'의 분위기는 시리즈 사상 최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역시나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이런 사실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그 향수 그리고 패배감이 주는 쓸쓸한 공기들, 난 어쩌면 스러져 없어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스파이물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만 보고 달리던 본드가 낡은 집 안에서 탄환을 갈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불리는 스파이들, 냉전 시대에나 필요했던 국가의 도구들이 현재는 어느 정권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버렸다고들 말이 많다. 이제 인터넷 하나면 모든 정보가 유통되고, 비밀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립이 되지 않는 오픈된 세상이다. 스파이 소설이 재밌는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쉿이라는 제스처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감춰졌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밀을 알기 위해선 문서를 찾아내야 하고, 정황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장편 이야기로 설 수 있게 된다. 그 와중에 발생하는 음모와 계략들은 철저하게 개인의 심증을 통해 얻어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스파이 물도 한계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정보를 인터넷이라는 창구 하나로 소비한다. '존 르카레' 할아버님의 작품은 그 시절의 고전이 되었고, '제임스 본드'는 체력검정에서 탈락해 전자기기에 의지해야 할 판이다. 그들의 축 처진 뒷모습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 그 증거가 바로 <007 스펙터>(Spectre, 2015)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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