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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8. 2021

밝은 밤이 찾아오는 '최은영 유니버스'

소설 <밝은 밤>, 최은영 저

 소설의 배경은 강원도 희령이다. 이혼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 지연은 도망치듯 바닷가가 보이는 마을 희령으로 이사를 한 참이다. 최은영 작가는 소설의 주요 배경인 개성과 대구 대전은 실제 지명을 썼지만, 강원도의 한 도시로 상정한 희령은 새로 만들었다. 지연이 과거를 지워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까. 그건 마치 마르케스의 마콘도나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처럼 작가가 뜻을 펼치기 좋은 너른 운동장 같다. 한적하지만 뭐든 꾸며낼 수 있는 장소다. 난 최은영의 첫 장편 소설인 <밝은 밤>을 다 읽고 다시 책의 표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저기가 희령이란 말이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본 것과 달리 희령의 밤은 분홍빛보다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더 느껴졌다. 밝은 달이 떠 있는 희령의 바닷가는 안온한 느낌보다는 깊은 잠에서 깬 개운함처럼 차오르는 열기에 가까웠다. 밤임에도 희한하게 밝아 보이는 그곳은 소설에만 있는 곳이지만, 오직 다정한 이들만 사는 세계라는 점에서 최은영 유니버스의 운신의 폭을 넓혀준 도시다.


 지연은 비릿한 열패감과 누구나 예측할만한 비참함에 젖어있다. 자신의 고통이 그저 그렇게 평가받는데 익숙해질 즈음 직장을 옮긴다는 구실로 살던 도시를 떠난다. 새로운 직장에서 쥐 죽은 듯 지내며 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고 아무도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는 곳이 필요했다. 낯선 이의 동정과 연민을 힘겨워하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신경증이다. 그렇게 앓는 지연은 희령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게 된다. 우울과 냉담함이 가시지 않는 시간이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바다가 보인다는 위안이 그녀의 몸을 어딘가에 기댈 수 있게 해 줬다. 최소한의 사람만 만나면서 홀로 식사하고 느슨한 산책을 즐기던 지연은 어느 날 어릴 적에 뵌 후로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와 조우하면서 이야기는 본류에 합류한다.

 소설에서 지연과 이혼한 남편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삶은 꽁꽁 언 강물과 같다." 그러니까 삶은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다는 식의 운명론이다. 가정을 팽개치고 사랑을 볼모로 떠난 자 답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모든 일이 벌어졌구나 손을 놓는 식이다. 당위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우선시하는 무책임한 태도다. 맥락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세계관은 그렇게 지연을 옥죄어 왔다. 지연에게 꽁꽁 언 강물은 한 인간을 괴물로 만든 구렁텅이다. 그 괴물의 포효에 주눅 들어 내 처진 존재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모든 걸 기질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따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지연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대화를 시작한다. 엄마의 얘기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전혀 모르고 살았던 모계의 역사에 빠져든다. 제 처지는 잠시 잊고 고조모와 증조모의 기구한 삶을 들으며 과거로부터 이어진 끈을 더듬어간다. 지연에게 전쟁과 피난 생계와 고통으로 점철한 사정은 멀게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나의 역사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족보에도 없는 이름을 들추고, 바깥 외자를 쓰는 조상을 안으로 들이는 과정이다. 여성의 미시사를 되짚으며 지연은 탁한 삶을 환기한다.


 지연은 이혼한 남편과 식구들을 보고 싶지 않아 희령에 왔다. 지연의 외할머니도 남편과 헤어지고 쭉 희령에 살아왔다. 증조할머니의 오랜 친구인 새비 아주머니도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딸 희자와 함께 희령을 찾는다. 최은영은 여성의 땅을 만들고 거기서 역사가 지운 여성의 삶을 돌아본다. 작가를 비롯한 지연의 삶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모태를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은 비겁하거나 기껏해야 대의를 위해 죽거나 생계를 위한답시고 위험을 무릅쓴다. 광포한 시대에 더 큰 자취를 남기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여성들을 남긴 채 사라진다. 의도가 어찌했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오갈 데 없이 몰린 여성들은 서로 의지하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다. 최은영이 집중하는 가치는 탈 남성의 세계이고, 그곳에는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 약한 비위, 중요하고 숭고한 가치에 대한 헌신이 자리한다.


 지연은 희령으로 와서도 그간 남편이 한 말을 되새기고 곱씹는다. 내 불행의 발원인 그의 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필사적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내어 뻔한 비극 속에 머물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남편의 외도까지 참으라고 닦달하는 엄마의 방식을 부정하며 뒤늦게나마 독자적인 삶을 이룩하기 위해 자구한다. 지연과 외할머니의 대화는 그런 의미에서 지연에게는 치료의 한 형태로 느껴진다. 자신의 역사를 되짚으며 속 시끄러운 소리를 잠시나마 밀어내는 과정이다.


 소설은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을 불러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 피난길을 소설에 그리면서 남성을 배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성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조연이었고 누군가를 빛내주는 헌신 그 자체였다. <밝은 밤>은 아무도 마이크를 주지 않았던 그들이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모욕적인 시대를 이겨내 왔음을 알린다. 누군가의 아내로서 뒷바라지나 하고 누군가의 엄마로서 기능적으로 쓰이는 존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불을 밝힌다. 소설은 여성들의 처지를 그저 동정하거나 연민하거나 고작 남성들의 장대한 삶을 극적으로 장식하는 꽤 비중 있는 조연 정도로 치부하지 않는다.


 지연은 소설 말미에 할머니의 오랜 인연이었지만 격랑의 현대사를 거치며 만날 수 없었던 희자를 불러들인다. 그들을 연결함으로써 아직 끊어지지 않은 모계의 서사를 이어나간다. 이제 지연이 희령에서 할 일은 다 끝이 났다. 할머니는 자신의 손주에게 모계의 서사를 전수했고, 그걸 들은 손주는 이제 다른 도시에서 희령의 기억으로 살아갈 것이다. 펜대를 쥔 자는 선별하여 기억한다. 남기고 기억해야만 하는 위대한 서사를 재단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한다. 이제 더는 무도하게 잊히지 않는다.


 대전에 새롭게 정착한 지연은 반려묘가 생겼고, 소도시가 아닌 대도시의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난 소설 속의 인물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핵심이다. 그 변화에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난 추락과 상승의 움직임을 유심히 본다. 괴물이 되어가면서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간절히 구원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다.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는 숭고하다. <밝은 밤>의 지연은 자신의 추락을 의식하고, 자신의 전락을 구원의 재료로 사용했다. 자신의 실패한 이야기가 다시 상승하기 위해서 곡절 많은 모계를 이야기로 되살려냈고, 끝내 바닥을 치고 다시 상승의 곡선에 올라탔다.


 지연은 모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어갔을까. 제 삶에 없었던 증조 고조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어머니의 속내를 미루어 짐작하면서 뭐가 나아졌을까. 고작 모계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지연이 밝은 달을 볼 수 있는 요건이 될까. 이건 모호한 위안이다. 지연은 정말 잘해나갈 수 있을까. 난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에서 어떤 이어짐의 안도를 느꼈다. 마치 씻김굿처럼 저 먼 곳에서 떠도는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주는 과정을 거친 셈이다. 지워진 존재를 불러내는 것.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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