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엄청난 실력자는 아니다. 그저 자급자족하며 내 가족과 사랑하는 지인들과 나눠 먹을 수 있을 정도.
사실 내 요리의 시작은 식탐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내 입맛에 맞게, 또 제 때에 먹기 위해 시작된 일종의 호기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한 원초적 본능이었달까. 그렇게 결혼 후 10년을 본능껏 살다보니, 서툴렀던 칼질은 어느새 수준급이 되었고 밑찬이나 국 정도는 레시피없이도 가능해졌다. 오늘 저녁도 반찬 두 가지에 국 하나 끓이데 30분이 걸렸으니 이쯤이면 프로 주부라고 해도 될까.
나름 바쁜 와중에도 가끔은 레시피를 정리했고, 요리의 과정이나 플레이팅 한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주로 포털사이트나 블로그, 또는 요리책에서 따라하는 레시피들이었지만, 첫 시작만 그러할 뿐 같은 음식을 반복해서 만들 때는 결국 나만의 노하우가 생기곤 한다. 재료의 조리법이라든가, 양념의 배합, 새로운 소재의 추가 등등. 주로 가족들의 입맛에 맞게 약간씩 변형하거나 아예 새로운 양념을 만드는 방법으로 나의 레시피들을 기록한다.
어느 날, 열심히 레시피를 기록하는 나에게 지현이가 묻는다.
"엄마, 엄마는 블로그에 왜 자꾸 요리하는 걸 올려?"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엄마는 시현이랑 지현이가 커서 엄마가 해 준 음식이 먹고 싶을 때, 이 사진이랑 글을 보고 직접 만들어 먹었으면 하거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주방에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엄마를 늘 보았던터라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자연스레 알게 되어서일까.
아이들은 나의 속마음을 알까.
4년전 생사와 직결되는 병으로 내가 수술을 하고,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가장 걱정이 되었다. 내가 없다면...나의 나머지 가족들이 아이들을 살뜰히 돌보겠지만 나와의 추억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꽤나 많은 시간 눈물을 흘렸다.
지금이야 다시 건강해져서 쓸데없는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언젠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든, 결혼이 되었든,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아이들과 나는 이별을 하게 될 것을 안다. 그때 아이들이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그리워하며 나와의 추억을 떠올린다면...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 음식을 당장에 먹을 수 없는 아이들이 너무나 안쓰러울 것 같다. 그래서 늘상 아이들에게 엄마가 요리를 해 줄 수 없는 순간을 대비해 먹고 싶은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함께 요리를 한다. 아이들의 정서발달, 즐거움, 놀이의 의미가 아니라 생존요리이다. 아이들의 요리는 진짜 요리를 배우고, 자기만의 레시피를 찾는 과정이다.
재료의 이름들을 익히고, 준비 과정을 배운다. 야채를 썰어보기도 하고 날 것 그대로 맛을 보기도 한다. 계량스푼으로 양념을 깍아서 섞어보는 날도 있었다. 아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신기해하고 즐거워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예쁘다가도 가끔은 슬프다. 이 모든 것이 헤어짐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2년 전,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기다리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딱 이 맘 때였다.
어제가 오늘같고, 내일도 오늘같았던 그 땐 날마다 아주 게으른 아침을 먹었다. 프렌치 토스트, 핸드메이드 와플, 스프, 샐러드, 오믈렛 등등 진짜 만들 수 있는 건 다 아침식사로 제공했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녀석이 아침메뉴로 팬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너무 귀찮았다. 좀 늘어져 있고픈데 아침부터 팬케이크 반죽이나 만들라니. 그러다 잔머리를 좀 굴려서 소파에 누워 아이에게 팬트리에서 재료를 꺼내오라고 주문했다.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버터, 설탕 등등
아이가 의자를 밟고 올라가 재료 다 꺼내고 나서야, 나는 믹싱볼과 휘스커 그리고 계란 두 알 꺼냈다.
계량컵과 스푼을 내어주며 아이에게 주문한다.
그런데 녀석이 날더러 기다리라며 갑자기 종이와 펜을 가져오더니 이제 시작해보래. 뭐지?
7살의 '썩은 반죽' 팬케이크 레시피 @슈스
팬케이크 레시피를 받아적는 귀여운 일곱살이란.
큰놈은 지독히도 쓰고 그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라 꽤 이른 나이에 한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쓰기를 시켜본 적이 없다. 본인 의지가 없으면 절대 쓰지 않는데 이 상황이 얼마나 기특하고 귀엽던지.
계량을 하고, 레시피 한 줄을 쓰고 믹싱을 하고 또 다시 기록하며 이 날 아침 팬케이크 반죽을 준비하는데만 많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결국 아이는 반죽도 완성하고 나의 도움으로 팬케이크 굽기까지 성공하고 나서야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첫번째 레시피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물론 나중에 이 레시피를 보고 만든 팬케이크를 먹게 된다면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반죽을 꼭 썩게 만들어서 먹어야하는 팬케이크 레시피!)
큰놈은 가끔 생뚱맞게 자신이 커서 결혼하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잘 하는데 그 중 유독 자주 하는 말이
"나중에 아내랑 아이들에게 엄마의 레시피로 맛있는 OOOO을 만들어 줄거야!" 이다.
2,30년은 족히 지났을 어느날, 썩은 반죽을 구워 근사한 팬케이크를 만드는 나의 아이를 그려본다.
더는 진짜 아이가 아닐테지만, 그때의 추억으로 팬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고운 아내와 올망졸망 아이들까지 둘러 앉아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낼테지.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의 요리 시간은 충분히 행복하다.
너무나 사연이 그득한 팬케이크 레시피렸으려나. 중요한 건 당사자는 전혀 모르다는 사실!
오늘 저녁은 어떤 레시피에 사연을 담아볼까.
bonus. 일곱살, 시크릿 팬케이크 레시피
1. 계란 2알과 설탕 3큰술, 소금 약간을 넣고 섞다가 우유 1컵을 붓고 다시 섞는다.
2. 박력분 2컵, 옥수수전분 1큰술, 베이킹파우더 1/2큰술을 체에 쳐서 1번에 섞고 녹인 버터 1큰술을 넣어 섞는다.
3. 중불로 달군 팬에 버터나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한 국자 올려 윗면 기포가 나며 뒤집어 뒷면도 노릇하게 굽는다.
+레시피북에 나오는 골든브라운컬러의 팬케이크을 원한다면 약불로 고루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키친타월로 한 번 닦아주면 색이 팬케이크 전체에 골고루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