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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싹 Oct 26. 2024

수치심

뿌리와 치유

내 모습의 뿌리

상담에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수치심'이 내 안에도 머물러왔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성격적 특징으로 여겼던 어떤 것들이 어느 정도 수치심에 기원함을 알게 된 것이다. 타인과 눈을 맞출 때 의식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러나 분명하게 스치는 부끄러운 감정과 자동적 사고의 뿌리였고 누군가 빤히 쳐다보거나 여러 명이 한꺼번에 쳐다보는 시선들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기도 했다.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내 존재에 대한 부적절감을 들켜버릴 것 같은 부끄러움'이었다. 감춰야할 것 같은 무언가를 남이 들춰낼까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나의 부분(외모,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치에 대해 느끼는 근원적인 초라함이었다. 이런 부끄러움은 몸에도 있어서, 콤플렉스라 생각하는 신체 부분은 다른 부위와 달리 유독 뻣뻣했고 쉽게 굳었다.


선배 이야기

수치심의 역사를 더듬어가다, 대학 시절 한 선배가 생각났다. 약간 뚱뚱한 체형에 키가 작은 편이었고, 항상 풀 메이크업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자주 입던 선배였다. 친하지 않았지만 그 선배의 부모님을 같이 마중 나갔던 다른 선배가 전한 이야기가 유독 뇌리에 박혀있다.


마중을 나갔는데, 도착한 부모님이 그 선배를 보자마자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쩌지를 못하겠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더라는 것이다. 스무 살을 넘긴 딸과 부모 사이의 애정표현이라기에는 과하다 싶어 놀랐단다.


당시에는 '오버'라 말하면서도 내심 그런 관계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 장면에서 유추되는 심리적 자원과 작동 기제가 더 부러운 것임을 알았다. 부모님의 눈빛의 역사는 딸이 예상하는 세상/타인이 나를 대하는 시선으로 무의식 중 이어지기 때문이다. 선배는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스타일이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잘생긴 후배한테 어떻게 했다부터 시작해 예쁜 척한다와 같은 말들도 많았다. 미움받을 뭔가가 있었을 수 있고 부모님이 애정만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선배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초라함은 애초에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마땅하고 당연한 자기 가치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킬 게 없으니 부끄러움도 없었고 타인과 세상은 부끄러움을 들추려 드는 게 아닌, 대체로 호의적으로 나를 수용해 주는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었다. 수치심이 없다는 건 그런 거였다.


지금, 알아차림

수치심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 뿌리 깊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잠시 애도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되고 있음을 또 알게 된다. 마치 오랜 부유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물이 맑아지듯 말이다. 현시점의 내 인생에 필요한 과정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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