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빚고리 청산
아빠는 성정이 거칠어 친척들 사이에서는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으로 통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사소한 상황에도 자주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다. 상대의 말을 들을 줄 몰랐고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데도 서툴렀다. 몰래 대출받아 투자한 돈을 잃게 된 사건부터 직장 안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 구설이 아빠에게는 늘 끊이지 않았다. 예민했던 나는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몰라도 아빠가 세상에 지은 업보가 참 많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딸들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는데 못마땅하다는 눈빛과 분노와 짜증, 높은 언성이 내가 주로 접해온 아빠의 소통방식이었다. 싫었고 미웠다. 자주 억울하고 화가 났다. 얼마나 폭발할지 모르는 성질머리가 무서웠고 이런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게 창피했다. 창피해서 절친에게도 아빠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첫 남자친구가 자신은 여자가 아빠에게 사랑을 받고 컸는지 아닌지를 캐치한다고 말한 순간에는 조마조마해졌다. 친척이 일부러 그 관계를 떠보듯 묻거나 아들은 남편과 얼마나 친한지 자랑하듯 말했을 때는 화가 올라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빠에 대한 감정이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아빠라는 사람과 아빠 때문인 아픔을 인정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별로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해서, 이만하면 괜찮은 아빠임을 증명하려 애쓰고 희망을 걸어본 시간이 있었다. 그런들 변함없는 존재였는데도 말이다.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남에게도 힘든 사람이라는, 그 변치 않는 아픈 진실을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래서 당연히, 충분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고통이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도. 덕분인지 나는 처음으로 올해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했고 이렇게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아빠에 대한 마음 사이에 공간이 생긴 듯했다.
아빠가 되기 전 아빠의 삶을 떠올려 볼 공간도 생겼다.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아빠도 한 때 아이였다. 가난한 집 6남매 중 막내였는데, 친할머니는 임신 중 아이를 떼내려 이상한 음식도 드셨다고 한다. 그런데도 태어난 아빠를 가족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했다. 아빠에게는 그런 성취만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방법이었을 것이다. 감추고 싶은 슬픔과 부끄러움이 짐작됐고 이를 부정하기 때문에 아빠는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접촉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의 업(카르마)을 물려받고, 그 업을 자신의 대(代)에서 바로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빠의 일부는 나에게도 잠재되어 있었다. 마치 적정 온도에서 발아할 수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빠의 모순을 접하는 건 내 안의 모순을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차린 것들을 거름 삼아 더 나은 존재와 삶으로 나는 업그레이드돼야 했다. 그러다보면 또 다른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지니...
아빠도 언제부턴가 어릴 때만큼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눈을 잘 맞춰주지 않는 내 눈치를 봤고 잘못이 상기되는 상황에서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아무 말을 못 했다. 곧 마흔인 나에게 기어코 본인 신용카드를 쥐여줬고 대학원 등록금도 직접 내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아빠는 미안했던 것이다.
여전히 고집불통이지만 이제 이상하게 안쓰럽다. 계속 별로여도 좋으니 오래 건강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아빠와 나의 빚고리 청산이 끝나가는 중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