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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Nov 25. 2019

2019년의 열두 달을 기억하며

#1. 스물여덟.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든 상상하지 않았던 나이다. 고작 스물여덟 해를 향해 가뿐 항해를 시작한 나는, 커다란 배처럼 가벼이 흔들리는 침대에 몸을 싣고 생의 마지막 숨을 힘겨이 내뱉는 당신의 쪼글쪼글한 얼굴과 아이처럼 작고 연약한 팔다리에 어떤 경외심을 느낀다. 죄책감과 미안함을 마음속으로 수만  외쳐도 의식이 없는 당신은 듣지 못한다.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고 자연을 학대하며 동물을 죽여왔나. 우리는 쉽게 죽임을 당하고 연약한 살갗은 찢어지기 쉽다. 무심한 돌덩이가 머리를 깨부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삶을 마감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랑만이,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단언했나.


당신의 섬망을 지켜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어리고 희미한 나보다 곱절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는 당신의 따뜻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스쳐가길 바라며.


#2. 당분간 취업 걱정을 접어 둔다. 합격 소식을 받았다. 졸업 후 프리랜서, 인턴, 계약직을 거쳤다. 불안정한 삶이 싫어 취업 시장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졌던 과거의 나에게 버텨줘서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은 레이스임을 알지만, 숨을 고르고 편히 쉬어야 할 때도 있지 않나. 나의 실수와 과오를 올바르게 잡아준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가벼운 칭찬과 무거운 조언으로 울고 웃게 했던 회사 생활도 떠오른다. 나는 어느 화려한 영화제의 시상식 단상에 서서 수상 소감을 준비한다. 그러나 홀로 빛나는 것이 내게는 맞지 않다. 단상에서 내려오기로 한다. 모두가 기억하는 무대의 주인공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한편에 남을 조연이고 싶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에 남기를 선택했다. 나의 선택을 믿는다.


#3. 드라마 <체르노빌>과 <웨스트월드>를 봤다. 공교롭게도 HBO의 드라마들이다. 남들 다 본다는 왕좌의 게임은 어쩐지 잘 맞지 않았는데, 두 드라마는 혼을 쏙 빼고 집중했다. 피와 살점이 튀기고 머리통이 굴러가는 웨스트월드가 더 재미있었지만 마음을 울렸던 건 단연 체르노빌이다. 이익과 명예, 체면만을 좇는 수뇌부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영웅적 소시민의 힘을 철저한 고증으로 묵직하게 담아냈다. 한 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체르노빌 재난의 발단부터 재판까지의 과정을 느리고 깊은 시선으로 풀어냈다. 인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 불온한 세계의 초침이 멈추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한다.


#4. 불안할 때나 편히 쉬고 싶을 때 피아노 음악을 듣곤 한다. 최종 면접 전에도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쇼팽을 들었다. 피아노 선율을 가만히 듣는다는 건 어떤 종교의식과 같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이들의 소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게 종교와 음악은 그런 것이다.


#5. 올해 읽었던 가장 인상 깊은 책은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장애인과 그들의 삶에 대해 무지했던 내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책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서사가 존재한다. 각자의 서사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어느 날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남자를 보았다. 타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깊고 맑은 우물에 남자의 인생과 가치관이 빼곡히 적혀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흔들리는 지하철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6. 엄마는 몇 년의 습작 기간을 거쳐 어엿한 희곡 작가가 됐다. 작고 따뜻한 극장에 울려 퍼진 희곡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사랑스러웠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꿈을 잃지 않고 나아가라는 명언은 어느새 낡아 빠져 쓰이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꿈을 이룬 여성이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아름답고 희귀한 일일까.


#7. 나는 사회에 불만이 많아졌고 화를 냈고 분노했으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땐 무책임하게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소심한 인간이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깊은 무기력과 분노에 휩싸이곤 한다.


#8. 큰돈을 주고 등록한 영어 회화 학원의 선생님들은 상냥하고 유능하다. 그러나 책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면 무척이나 당황한다. 잘 모르는 분야라며 진땀을 흘린다. 어떤 날은 지하철에서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는 풍경이 쓸쓸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책보다는 스마트폰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는 답변을 들었다. 책과 독립서점을 좋아한다는 내게 old-fashioned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며 티 없이 웃었다. 그래, 나는 어느 정도 구식의 인간인가? 기분이 나쁜 듯하면서도 묘하게 수긍이 간다. 문득 책의 질감을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떠올랐다.


#9. 올해 두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상해와 태국. 상해의 쿰쿰했던 미세먼지와 엘사의 왕국 디즈니 랜드가 떠오른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친구 덕분에 편하게 다녀왔다. 태국에서는 병을 얻어왔다. 고급 마사지를 받으며 담이 걸린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덕분에 태국 병원에 다녀오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태국의 의료 시스템은 아시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발달돼 있다고 한다. 젊고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마사지받다가 어깨가 삐끗했다는 나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10. 회사 동기와 길상사를 다녀왔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셨지만, 우리는 곧 들어올 월급과 사야 할 목록을 늘어놓는다. 절을 둘러보는 부부는 부동산과 땅값에 대해 토론한다. 스님, 죄송합니다.


#11. 호스피스 병동에 30대 초반의 여성이 누워있다. 그녀는 환자다. 자궁경부암 말기. 호스피스 병동 한 켠에는 '섬망의 증상'이 프린트돼 꽂혀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티 없이 맑고, 하얗고 말간 피부가 아름답게 빛난다. 나는 그녀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흰 정장을 추스르며 만원 지하철을 타는 모습을 상상한다. 젊고, 유능하고, 재치 있는 커리어 우먼이었을 것이다.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 원 없이 웃고 슬픈 영화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서사를 상상한다.


#12. 오래도록 함께이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 올해의 첫눈은 놓쳤지만, 언제든 눈이 내리는 풍경을 함께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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