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화 Mar 17. 2020

나는 분노하고 연대한다

2020. 1 ~ 3월에 읽은 책들에 관한 짧은 단상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출퇴근길에 읽기 안성맞춤이었다. 직장인으로서 와 닿는 점이 많았던 동시에, 소설 속에 그려지는 직종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이쪽 계열 사람들은 이런 고민과 행동을 하겠구나 싶기도 했다. 작가가 그리는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희생당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또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요즘은 자신의 욕망과 꿈을 가감 없이 실현하는 여성들이 멋져 보인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 여성들 개개인의 노력과 연대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체제의 벽들에 부딪히는 무기력들이 온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비교적 아쉬운 단편도 있었지만 마음이 아린 문장들이 더 많았다.



<7층>, 오사 게렌발

오랜만에 만화책을 직접 구입해서 읽었다. 지인의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주문했다. 얇은 책이었지만 이야기와 그림체가 무겁고 아팠다. 데이트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며, 그 강도가 거세질수록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가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흑과 백으로 표현한 그림체가 독특하고 아름답기도 해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잔뜩 쌓아놓고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김금희

김금희 작가님의 유리처럼 섬세하고 투명한 단어와 문체를 좋아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괜찮아'라며 안주해온 단단한 벽에 돌을 던진 용기도. 작가님 신작이 나올 때마다 버선발로 달려가 1등으로 사고 싶다. 수록 작품 중엔 <레이디>가 가장 좋았다. 그런데 틈 날 때마다 생각나는 단편은 <너무 한낮의 연애>. 자주 생각나고 자꾸 담아둔다.



<루>, 킴 투이

"부모님은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돈을 물려주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이미 자신의 풍요로운 기억을 물려주었다고 믿는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주렁주렁 송이 지어 매달린 등나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경탄의 순간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알게 되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우리가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고 무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두 다리를 주었다. 그것이면 스스로 여행하기 위한 짐 가방으로 충분하다. 그보다 많으면, 들고 다녀야 하고 지켜내야 하고 항상 살펴야 하는 재산들이 우리의 여정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책물고기>, 왕웨이롄

중국 작가의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넓은 대륙만큼이나 커다란 상상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이 작가가 그리는 사소한 장면들도 참 좋았다.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 내는 문장들.

" - 자화. 

그녀가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 밥 먹었어?

그는 그녀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미친 듯이 자란 잡초 같아서 루제의 목소리를 더 활짝 핀 꽃처럼 느껴지게 했다."



<출근길의 주문>, 이다혜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들. 나도 작가님처럼 일 잘하는 여성이자 당당하고 똑 부러진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렵다.. 매우 어렵지만 인생사 최대 고민이 '일'인 이 시기에 읽어 속 시원한 책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여성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 같다. 가끔은 놀랄 정도로 솔직한 문장들에 열심히 밑줄 치며 가슴에 새겼다. (현실은 회사에서 눈동자를 대룩대룩 굴리는 찌랭이)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사랑스러운 소설. 주책맞게 계속 눈물이 났다. 이번 달부터 새로 시작한 독서 모임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이 책을 소개했다. 베스트셀러인 만큼 이미 많은 분들이 '나 이 소설 알쥐'하는 표정으로 웃고 계셨다. 



<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운동가기까지 시간이 남아 집 근처 서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던 와중 이 책을 발견했다. 목차를 훑어보니 무려 염소 숭배, 마녀 사냥, 원주민, 메시아, 종교, 각종 신화 등등을 다룬 문화 인류학 서적이었다. 깊이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전문 지식도 부족하지만 이런 키워드들에 늘 환장하기에 홀린 듯 구매했다. (이때 넷플릭스 드라마 '메시아'를 열심히 보고 있어서 더 끌렸다.) 집으로 가져가니 엄마 대학생 때는 필독 도서였다고 한다. 끝까지 읽는 데 유난히 오래 걸렸는데,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압축된 배경과 지식이 꽉꽉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1974년에 쓴 책이니 무려 50년 전 학자의 시선에서 서술된 책인데도 그 논제가 촌스럽지 않았고, 당대 스타 학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자신만의 관점을 뚝심 있게 전개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마녀 사냥에 대한 해석이 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횡횡하던 마녀는 대중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가상의 괴물이며, 모든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사회를 혼란케 하는 마녀에게 돌렸다는 점 등이 현대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악플, SNS,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하는 2차 가해 등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고 또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나 쉽게 '문화상대주의', '종교의 신비한 힘'이라는 키워드 속에 가둔다. 하지만 작가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에 합리적 이유와 배경이 있다고 역설한다. 이해할 수 없다며 포기한 것들로 인해 인간은 지금껏 어떤 희생을 치러왔나? 

"생활양식의 배경에 감춰진 원인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나쳤던 주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대답은 신밖에 모른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열심히 읽는 중. V. 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가 연상된다. 서로 다른 단편처럼 보이나 작은 연결 고리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너무 많고 감옥 가야 할 사람도 넘쳐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햇살이 비치는 봄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것. 그것 하나.



<김지은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한 자리에서 쭉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진도를 나가기가 힘든 책이었다. 틈 날 때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찾았다. 대중교통이나 회사에서 보기엔 힘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울고, 쉬면서 감정을 추스르고, 또 읽고 울었다. 결국은 끝까지 읽었다. 나는 그녀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관심 있게 지켜본 제 3자이기도 했지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를 믿었고, 승리하길 빌었지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적도 없고 2차 가해를 하는 이들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옹호하지도 못했다. 갈기갈기 상처 난 가슴을 부여잡고 글을 써 내려갔을 그녀,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일상들을 상상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자꾸만 울음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숨죽이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했다. 학원에서, 직장에서, 대중교통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수많은 여성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도 힘들고 아프겠지만 당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 꽃이 피고 푸른 바람이 부는 날 만난다면 꼭 안아주며 수고했다고, 잘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지지합니다, 연대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참고: "피해자 말이 다 옳다?" 성인지감수성의 오해와 진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09488.html

작가의 이전글 나의 바오밥 나무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