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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Jan 03. 2021

2020년의 열두 달을 기억하며

#1 바이러스가 덮친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쓸쓸했다. 2020년 12월의 나는 엄마와 함께 베를린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상상을 했었는데. 정말 상상으로 남았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아픈 사람들과 떠나간 사람들이 자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올해에는 그토록 당연하던 일상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 2월 25일의 일기: 좀 더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래도 살아갈 희망이 있었던 사람들이 죽었고 활기찼던 상점은 텅 비었다. 유령 도시가 되어 가는 걸까? 대구처럼. 오늘은 노원구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다.

  - 11월 17일의 일기: 연초에 느꼈던 코로나에 대한 공포증은, 연말이면 모두 사라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여행을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이러스는 오히려 추운 겨울에 더 활개를 치는 놈이었다니. 매일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가고, 자영업자들의 괴로운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2 내 일기의 많은 부분은 오빠와의 추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일년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해 준 사람이다. 우리의 사소한 순간들까지 차곡차곡 적어놓은 지난 일 년 간의 일기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인상 깊게 본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쉽게 까먹는 나라서, 막상 일기를 쓸 때는 귀찮았지만 지나고 보니 잘했다 싶다. 비록 모두가 힘들고 지치는 2020년이었지만, 다정하고 속 깊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나의 지난 일 년은 여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다.


#3 얼마 전 회사에서 성과평가를 했다. 1년 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의 이름 석자가 적힌 엑셀 파일과, 그들을 S, A, B, C, D로 나누고 장단점을 써야 했다. 단호한 구분과 차가운 숫자는 언제쯤 익숙해질까.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예상했던 등급이 쓰인 성과평가표를 받았다. 딱딱했던 엑셀 파일과 달리 예상외로 따뜻한 동료들의 메시지를 보며 슬몃 마음을 풀어 본다. 가끔은 체력에 부치기도 하고 성과가 미미할 때면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지난 1년이었지만, 아등바등해낸 결과물을 돌이켜보면 잘 해냈다 싶다. 올해 내게 올 새로운 도전 과제들과 커진 기대감들이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내가 받은 알파벳과 동료들의 따뜻한 메시지 사이의 그 중간쯤을 잘 지켜내고 싶다. 과도한 온정에 기대지 않고, 차가운 평가들을 무심한 듯 지나칠 수 있는 뜨뜻미지근한 태도 같은 것. 1월부터 꾸준히 쓴(쓰려고 노력한) 일기를 되짚어보니 회사 생활에서의 희로애락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의 하루 8시간을 꾸준히 소비하는 곳. 21년에는 내게 더 많은 책임과 임무가 주어졌다. 벌써부터 큰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만, 언제나 그렇듯 잘 해내는 내가 되기를.


#4 2019년 12월부터 시작한 필라테스. 비록 최근에는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센터가 문을 닫아서 한 달째 운동을 못하는 중이지만, 뭐하나 꾸준히 하지 못하는 성격인 내게 1년 여간 필라테스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과 다름없다. 체력이 부족한지, 철분이 부족한 것인지 이른 아침의 만원 지하철을 탈 때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곧잘 들곤 했었다. 2019년 연말 즈음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출근 지하철에 올랐을 때, 손이 차갑게 마비되고 구토기가 올라온 후부터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아주 성실한 수강생이었다고는 절대 말하지 못하겠지만, 기초체력을 조금은 키운 것 같아서 스스로 뿌듯하고 기쁘다. 이 상황이 나아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역시 운동이다.


#5 2020년은 언어 공부를 열심히 했던 한 해로 기억하고 싶다. 연초에는 독일어 공부를 했다. 학원도 다녔고, 꽤 비싼 인터넷 강의도 끊었다. 간신히 A2까지 올라갔는데 제2외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다져야겠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21년에도 일단은 영어 공부에 집중하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면 다시 독일어 공부를 해보고 싶다. 배울수록 매력적인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했으면 영어와 독일어를 병행해서 공부했을 텐데. 7월부터는 을지로에 있는 영국문화원에 등록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프라인 수업보다는 온라인 수업을 더 많이 참여한 느낌, 큰돈 썼는데 매우 아깝다.. 그래도 일주일에 적으면 90분, 많으면 세 시간 동안 부족한 영어로 떠들려고 노력한 공이 있었는지 조금은 회화 실력이 는 느낌이 든다. 21년에는 회사에서 영어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저 잘하고 싶다.


#6 N번방 사건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악행이다. 여성 청소년을 포함한 한국의 여성들은 비열하고 더러운 의도 하에 성적 대상화됐고 난도질당했다. 이 범죄의 존재는 유튜브 닷페이스 영상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수의 남성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여성들을 유린할 수 있는지 처음에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 동시에 목소리를 내는 것의 중요성과 연대의 가치를 몸소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다.

#6-2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2020년. 아동학대, Black Lives Matter, 기후 변화.


#7 지난한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동력 중 한 가지는, 나의 동기들이다. 2019년 3월 11일에 나란히 입사한 세 명. 사실 입사한 해에는 서로 팀에 적응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자주 모일 시간이 없었는데, 20년에는 유난히 자주 동기 모임을 갖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던 것 같다. 그만큼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친해진 느낌이 크다. 21년부로 동기 한 명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었다. 앞에선 쑥스러워서 많이 표현하진 못했지만 연말부터 괜히 허전하고 우울한 느낌이 커졌던 것 같다. 기쁘나 슬프나 그 어떤 것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는데. 회사가 괜스레 야속해지기도 한다. 동기 한 명이 자취를 시작해서 그녀의 자취방에서 요리를 해 먹고, 게임도 하고 회사 욕도 하고 케이크도 불었던 기억들. 건대 호수 한 바퀴를 아무 말 대잔치 하며 빙- 둘러봤던 순간. 우리는 12월 31일에 줌으로 만나 무려 4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다들 지치지도 않는지, 아니면 헤어지는 순간이 아쉬워서였는지, 12월의 마지막 날이라 괜히 센티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8 20년 3월부터 홍대의 한 작은 독립서점에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독서 모임은 몇 번 해봤지만 늘 썩 만족스럽지 못해서, 사실 별 기대를 하고 간 곳은 아니었는데. 3월의 일기를 보면 그 당시의 만족스럽고 쑥스럽고 좋았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던 공간. 특히 서점의 주인이신 대표님의 밝은 에너지가 참 좋았고 책 이야기를 하며 3~4시간을 훌쩍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대표님이 추천해주신 책은 정말 한 권 한 권이 모두 재미있기도 했고. 연말의 두 달은 바쁘기도 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잠깐 쉬었는데, 대표님께서 서점의 백일장 프로젝트를 소개해 주셔서 기쁘게 참여하기도 했다. 운 좋게 최종 10인에 들어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반짝이는 기억들을 많이 전해준 곳이다. 한동안 못 갔는데 빨리 방문하고 싶다.


#9 엄마의 극본이 연극으로 올랐다.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따뜻하고 벅찬 감동이 있어서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눈치 없게 눈물이 나왔다. 엄마의 연극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딱 4일 동안 오프라인 공연을 했고 그 후 기약 없이 미뤄졌다. 오빠와 오랜 친구 한 명이 함께 해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고 야속하다.


#10 그리운 봄날의 일상 기록

  - 4월 5일의 일기: 오빠와 창동에서 만나서 두 손에 커피 한 잔씩 쥐고 중랑천을 걸었다. 작은 강아지들은 서로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지만 안온한 표정으로 길을 거닐고 있다. 꽃이 있어서 아름다운 봄날. 불투명한 실개천 위에 오리가 몸을 달군다.

  - 4월 10일의 일기: 오랜만에 르몽드 모임을 했다. 맛집으로 소문이 나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엄청 많고 시끄러워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오고 가는 삶의 이야기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얼굴이 바알간 취객들.

  - 4월 12일의 일기: 기다리던 앤디드 성북에 갔다. 바깥의 풍경은 조금씩 저물어 가고, 좋은 날이 그렇듯 분홍빛으로 노을이 물들어 갔다. 나무에 새 지붕이 많았는데, 까치와 이름 모를 새들이 빙글빙글 돌며 집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구경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 4월 23일의 일기: 나는 술을 못 먹지만 예쁜 리본을 단 와인과 다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표님은 흥분한 상태로 쫀드기를 구우셨고 치킨도 시켰다. 세대를 초월해서 책과 인생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참 소중한 시간이다.

  - 4월 25일의 일기: 우리 가족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11 난 여행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못 가는 2020년이 너무 아쉬웠다. 대신에 오빠와 짧게 국내 여행을 자주 다녀왔다. 다양한 곳을 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강원도 원주와 북한산 카라반. 원주에서는 내가 갔던 박물관 중 손에 꼽을 만한 아름다운 '뮤지엄 산'을 다녀왔다. 입장권 가격은 매우 사악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결합한 아름다운 전시들이 정말 아름다웠다. 뮤지엄 자체도 높은 산 위에 지어져서 공기도 상쾌하고 푸릇한 나무들이 정갈하게 뻗어 있었고. 5월 3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돌아보면 이번 여행은 매 순간이 행복했네." 숙소도 정말 예뻤는데 큰 창문으로 작은 대나무 숲이 보였다.

12월의 북한산은 정말 추웠지만 그만큼 카라반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우리의 많은 기념일들을 소박하게 기려 본다. 김범수와 이문세의 노래가 참 잘 어울리는 계절.


#12 평범한 한 해의 시작이었다면 더 들뜨고 설레었을까? 바이러스가 잠식한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고 쓸쓸하다. 원래의 나라면 해외여행을 떠나 담뿍 우린 기억을 안고 한 해를 시작했을 텐데. 요즘은 한없이 무기력하고 우울해지기만 한다.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디 우리의 내일은 덜 불안하고 더 행복하길.



2020년의 콘텐츠

·1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월 작은 아씨들

·3월 메시아 샤인 드라큘라

·4월 이어즈&이어즈

·5월 퀴어아이 천사들의 증언 인간수업

·6월 나르코스

·7월 밤쉘

·8월 프라이빗 라이프

·9월 헝거게임

·10월 라이브

·11월 나의 문어 선생님

·12월 윤희에게 마틴 에덴



2020년을 강타했던 MBTI 테스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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