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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19. 2023

10월 일본 홋카이도 2 (오타루, 비에이)

조금 더 사적인 감상들

얼음 바다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얼어붙은 수면을 깨며 느리게 나아가는 쇄빙선은요?
콰콰콰콰콰콰 부서지며 우는 바닷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으시겠군요.
... .
기회 되면 한번 보시지요. 볼 만합니다.
정용준, <유령>



삿포로 역에서 오타루 역으로 가는 쾌속열차는 30분 남짓을 달린다. 조금 기다리면 오른편 창 너머로 바다가 펼쳐지는데, 종일 비가 와서인지 푸른색을 약간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영화 <윤희에게> 마지막 장면은 열차 차창 너머 바다 풍경으로 시작한다. 윤희가 쥰에게 늦게나마 부치는 러브레터가 잔잔한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려보다가, 달콤한 후르츠 산도를 베어 물고, 동그란 모자를 꼼꼼히 눌러쓴 역무원이 바삐 돌아다니는 풍경을 관찰해 본다. 이방인은 자꾸만 바다로 시선을 빼앗기고, 주민들은 심드렁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멈춰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여행을 하고, 절친한 친구는 결혼 준비를 하고, 옆자리에 앉은 동료들은 일을 하고 있다. 여행은 멈추는 일일까 이동하는 일일까.


이제는 여행이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꿀 만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멀리 떠나 돌아오면 유영하던 시간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깊어지고 넓어졌을 수야 있지만, 그럼에도 관성적으로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씁쓸함을, 이제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흑백 사진 속 풍경은 종종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곳의 주민들과 관광객이 수천수만 번 렌즈에 담았을 오타루 운하 풍경을 우리도 담아내 본다. 눈으로 담았던 풍광보다 음각과 양각이 도드라지고 고즈넉하다.

부슬비를 뚫고 걷다 철도길을 발견했다.


20살, 성인이 되자마자 하루 10시간-시급 4,500원을 받으며 뷔페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온몸 혹사해 가며 땀 흘려 일한 작은 월급이 내 통장에 들어왔을 때, 탈탈 털어 홀로 일본 여행을 떠났다. 일도, 여행도, 관계도 온통 처음이었던 나날들. 여행지로서 일본은 무척 매력적인 곳으로 다가왔고, 당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풍경 중 하나가 작은 동네를 천천히 가로지르던 철도였다. 문득 온통 삶을 뒤흔들었던 많은 '처음'이 생각난다.    

렌트를 하고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비에이는 여행책자와 블로그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푸릇푸릇한 사진 속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먹구름 사이로 간신히 손가락 몇 개 끼워 넣은 듯한 미약한 햇살만이 반겼고, 유명한 관광 코스인 크리스마스 트리나 마일드세븐 언덕은 강풍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 멋없는 풍광과 멋지게 스캔한 필름 사진 사이에는 나만이 알 수 있는 간극이 있다. 벌어진 틈 속에 그날의 기분과 사건이 겹겹이 쌓여있다. 틈을 조금 더 벌려 상상력을 불어넣어 본다.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짧고,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스스로를 정의 내리는 일이 손쉽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털어놓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부채감인 동시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희미한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 작은 공간에 조금씩 기록을 흩어두니 이제야 제대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안녕,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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