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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Oct 15. 2023

10월 일본 홋카이도 1 (삿포로, 오타루, 비에이)

무더웠던 여름이 지난 가을의 초입에서

아주머니, 10월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10월을 빼버리고 느닷없이 9월에서 11월이 돼 버린 다면 얼마나 시시할까요?
이 단풍 빛깔을 보세요. 가슴이 두근두근하죠? 이거 제 방에 꽂아놓으려고 꺾어왔어요.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일본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여독을 채 풀지 못한 채 부지런히 여정을 꺼내본다. 두툼한 니트를 걸쳐 입어도 꽤나 쌀쌀했던 10월 초의 북해도.

서울에서 수없이 마주친 비슷한 풍경도 여행지에서는 특별해진다.

모이와야마 전망대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아름다운 야경을 눈에 담았다. 잘못 현상된 필름의 궤적이 꽤나 맘에 든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촛농 같기도, 마구 휘몰아치는 바람의 흔적을 애써 따라간 것 같기도 하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선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넉넉한 크기의 케이블카에 꽉 들어찬 사람들.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한국어가 마구 뒤섞인다. 들뜬 목소리들. 아는 단어 하나로 겨우 알아챈 맥락과 양갈래를 묶은 여자 아이의 칭얼거림. 아이를 달래는 부드러운 외국어.

우리의 숙소가 있던 스스키노 역에서 지하철 세 정거장을 건너 홋카이도 대학교에 방문했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대학교는 늘 설레는 장소다. 홋카이도 대학 캠퍼스는 정말 넓고 아름다웠는데, 한 품에 안아도 매미가 된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커다란 나무와 푸르른 녹지가 오래된 건물과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는 곳이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부지런히 스며드는 기분 좋은 햇살과 자전거를 타고 수업 가는 학생들의 풍경이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대학교를 뒤로 하고 작은 동네 카페를 찾아가는 길에서. 낮고 네모난 건물들이 정갈히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작은 쪽지를 곱게 접어서 간직하고, 유행이 지난 니트를 깨끗하게 손질해서 돌아오는 계절마다 꺼내보는 일. 오타루역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것은 하나도 없지만, 낡고 오래된 것을 정성스레 쓸고 닦은 작은 역사는 참 다정다감하구나.  

영화 <윤희에게> 촬영지, 작은 도시 오타루. 영화에 나왔던 장소를 보고 있노라면 평범한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색이 덧입혀진다. 윤희와 쥰이 걸었던 눈이 소복이 쌓인 오타루 운하는 볼 수 없었지만 강한 바람과 비가 내리던 오타루도 그 자체로 좋았다. 비가 오면 도시의 색과 냄새가 선명해지기도 하니까. 기껏 차려입은 주황색 니트와 얇은 바지가 온통 젖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시야를 방해해도 그저 재밌었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신호를 이토록 선명하게 보내주는 색의 조합이 경이롭다. 작은 신호들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요즈음이다. 여행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넘은 지금, 작은 갤러리를 감싼 나무들이 조금 더 빨갛고 노란빛으로 물들진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안녕, 홋카이도. 많은 추억과 기억의 모서리를 접어 두고 다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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