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다이어리: 폭염, 부드러운 바다

by 연화

경상남도 남해, 7월의 어느 날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02.jpg

애정해 마지않는 나의 동료와 함께 떠난 경상남도 남해 여행.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목격한 풍경들이다.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13.jpg

우리는 제법 잘 맞는 여행 메이트다. 둘 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별 것 아닌 풍경에도 쉽게 마음을 빼앗겨 발걸음이 더뎠다. 한 사람이 멈추면 그도 자연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담벼락에서, 길가에서 마주친 동물들에서, 오래된 벽에 새겨진 낙서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곤 했다.

우리는 책을 좋아한다. 에스파의 아마겟돈이 흘러나오는 바에서, 더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아무도 없는 설리 해변에서 책장을 들춘다. 드문 일이다.


그토록 비슷한 우리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책을 고르는 취향. 친구는 사랑, 글쓰기, 열정, 아니 에르노를 발견하고, 나는 고통, 신, 세계, (어두운) 소설 쪽으로 몸을 튼다. 우아하기 그지없었던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책방, <흙기와>에서 서로 고른 책을 공유했다. 내가 고른 책은 죄다 칙칙해서, 붉고 푸릇한 친구의 책들에 온통 색상을 빼앗긴 것 같았다는 에피소드.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05.jpg

남해를 둘러싼 바다는 내가 그간 봐왔던 어느 바다와도 색이 달랐다. 일부러 채도를 낮춘 듯한 고요한 푸른색이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처음에는 구름이 잔뜩 낀 날씨가 바다의 색에 영향을 주는가 했는데, 다음 날 해가 높이 떠올랐음에도 뽐내지 않는 차분한 파랑이 내내 밀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작년 8월에 다녀와 작성한 '구례 초록 여행' 글에 권월 님의 <은모래해변에서(여름)>라는 앨범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썼다. 그 은모래 해변에 드디어 도착했으니, 이제야 완벽한 조응을 이루는 곳에서 음악을 다시 들어 본다. 운이 좋게도 마침 우리가 머무는 토요일에 '미조 스페이스'에서 권월 님의 공연이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무지개색 페인트를 칠한 작은 항구,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산이 보이고, 새들이 여유롭게 바람의 궤도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 그림 같은 풍경 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공명했다.


권월 님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다.

https://youtu.be/79UC4XJ77x8?si=olAV0gUHdhv2ytc1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22.jpg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06.jpg
KakaoTalk_20240730_195436832_09.jpg

차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우리가 봐둔 다랭이 마을의 카페는 마을 안에서도 꽤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꽤나 구불구불한 경사를 온몸으로 느끼며 무더위를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색색의 지붕 위로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하는 바다와 고원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마치 더위에 취해가는 느낌이었다.

KakaoTalk_20240730_195052642_04.jpg
KakaoTalk_20240730_195052642_08.jpg

우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앞에 할머니 두 분이 천천히 걸어가고 계셨다. 우리는 그분들을 앞질렀고, 할머니는 무릎을 짚으며 평상에 자리를 잡으셨다. '역시 젊음이 좋네, 청춘이야-'라고 말씀하시며. 할머니의 얼굴은 평온히 웃고 계셨는데, 우리는 더위와 땀에 잔뜩 지쳐있었다. 그런 사소한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될 때가 있다.

KakaoTalk_20240730_195052642_20.jpg

때는 남해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일요일. 우리는 보리암을 보기 위해 금산에 올랐다. 폭염 아래 등산에 잔뜩 겁을 먹은 것도 잠시.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무더운 햇빛을 가려주는 시원한 나무 그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불어오는 구름과 바람이 마치 구세주 같았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가지각색의 돌멩이가 서로를 의지하며 마치 작품처럼 쌓여 있어서, 다양한 사람의 소원과 염원이 유유히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전날 저녁 방문한 '서민식당'의 유쾌한 사장님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보리암에서 간절한 딱 하나의 소원만 말해야 신께서 들어주신단다. 어떤 소망을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망설이다 보니 보리암에 도착했다.

KakaoTalk_20240730_195052642_24.jpg
KakaoTalk_20240730_195436832_05.jpg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구름은 바람의 일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이리저리 흐르는 구름의 궤적을 그토록 자세히 본 일은 처음이었다. 압도하는 풍경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남루하다.

KakaoTalk_20240730_195052642_26.jpg

사바하, 사하바. 염원을 이곳에 두고 온다.

KakaoTalk_20240730_195117204_04.jpg
KakaoTalk_20240730_195117204.jpg

서울로 돌아오기 전 우연히 들렀던 앵강마을. 당장이라도 토토로가 튀어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마을에서, 온통 까만 강아지 별이를 만나고, 마을을 꼭 닮은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따스함을 얻고, 마지막 필름의 마지막 셔터를 눌렀다.

KakaoTalk_20240730_194952413_17.jpg
KakaoTalk_20240730_195436832_08.jpg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설리해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붉은 해가 사라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여행의 순간이 충만하고 때때로 경이로웠기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주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만난 다정한 인사와 아름다운 풍경들을 남겨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주에서의 아침 그리고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