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의 구스이-
# 해운업의 구스이
<대일본직업별명세도>의 혼마치 1정목에 면해 구스이 회조점(楠井回漕店(株), 감포리 382번지)과 구스이 상점이 있었다. 현재 감포제일교회에서 감포안길로 내려와 감포신협언저리일 것으로 추측된다.
구스이회조점의 회조(回漕)란 해운운송업을 가리키니, 요즘말로 구스이해운 정도 될 것이다. 구스이 회조점은 중유, 시멘트, 미곡과 같은 화물을 운송했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1942년)에 대표는 구스이 리세이(楠井理生)로 되어 있고, 자본금 50,000엔으로 운수 창고를 가지고 해운업, 대리점업, 앞 각 호의 부대사업을 하는 회사로 나와 있다. 이사는 구스이 가즈야스(楠井數康)이다.
구스이 상점은 조선우선(朝鮮郵船)주식회사, 조선기선(朝鮮汽船)주식회사의 화물과 여객을 취급했다. 조선우선주식회사는 1912년 조선총독부의 국책 해운 회사로 설립되어 조선 연안 항로를 독점했다. 1925년 당시 부산-원산 간에 700톤급의 웅기호, 신의주호, 충청호를 운영하며, 월 7회 감포를 정기 기항했다. 부산-울릉도 간에도 372톤급의 온성호를 운영하여, 기항지도 평해-구산포-구룡포-감포-방어진-장생포 등지로 늘어났다. 월 4회 감포에 기항하였다.(유미림 <일제 강점기 언론에 보도된 울릉도 사회>, <해양정책연구> 제34권제1호, 49쪽)
조선기선주식회사는 조선우선주식회사의 자회사로, 민간업자들 간에 연안항로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1925년 몇몇 해운회사를 합쳐 설립되었는데, 1941년 서일본기선에 합병될 때까지 남해안 항로를 중심으로 한 연안 해운업의 가장 큰 회사였다고 한다.(배석만「조선기선주식회사」<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4028
조선기선은 부산-구룡포간 연안항로를 3척의 배로 운행하였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방어진, 감포,양포, 구룡포를 매일 운행하였다고 한다. 밤에 부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오전에 구룡포에 도착, 구룡포를 오후에 출발하여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뻗어 나가는 조선기선(伸び行く朝汽)』,조선기선주식회사, 1941)에 회사연혁과 자세한 항로, 시각표가 실려있다.)
부산-포항 간 항로는 하야시가네구미가 운영하는 106톤급의 가고시마호가 월 15회 감포에 기항하였다. 감포에서는 ‘구스이 상점’이 그 업무를 하였다. (<조선항만>,1925:179,190) 에는 구스이 상점의 구스이 요시지로(楠井吉二郞)는 감포전기 이사로도 등록되어 있다.(<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7년판)
감포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 중, 현재도 건재한 가옥 중 하나가 구스이의 집이었다 한다. 감포 행정복지센터 바로 아래 향나무가 멋진, 읍장 사택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박종호씨 자택이 구스이의 집이었다고 한다.(「회한 속 사라지고 있는 감포의 옛 가옥들」「경주신문」2011.10.7) 규모로 보나, 상태로 보나, 구스이가 감포에서 해운업을 통해 쌓은 재력을 가늠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