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포에서 후쿠이까지 동해의 게로드

-다쓰노의 게통조림공장-

by 뚜벅이


감포에 통조림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일본직업별명세도> 하단, 쇼와초 ‘조선인마을’ 좌측에 ‘수산업 다쓰노산스케’가 보인다. 쇼와초는 현재 감포로 7길과 감포로의 좌측, 현재 감포 오거리 공설시장 근방이다.


‘수산업 다쓰노 산노스케’는 게 통조림공장을 운영했다. 후쿠이(福井) 현 뉴(丹生)군 출신 사업가 다쓰노 산노스케(龍野三之助, 1875-1935).


현청으로부터 어업보조금을 교부받아 후쿠이현 어업단을 조직하고 이를 인솔하여 조선으로 건너와서 경북 연안에서 어업에 착수, 감포에 거주한 이후로는 주로 게(蟹) 통조림업을 개시, 감포어업조합을 조직하여 수산업의 융성을 도모하고, 면협의회원, 또는 금융조합 기타에 관계하고, 이곳의 축항기성회를 조직, 군회 의원, 군회 의장 등 공직에 관계, 후쿠이현 수산조합회장으로 이 지방 수산산업의 진흥에 노력. (<조선공로자명감>,732)


다쓰노는 후쿠이에서 집단으로 후쿠이현 어업단을 조직하여 어민들을 이끌고 1917년 감포로 건너왔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도로 집단으로 농업이민을 오거나, 구 만주의 변경지대로 군사와 개척을 목적으로 집단식민을 추진한 케이스와 유사하다. 통조림업, 수산조합 결성, 항만건설 등, 초기 감포 일본인이주촌 건설에 여러 방면에서 관계한 인물로 보인다.


후쿠이현은 감포에서 직선으로 지도에 그어보면, 시마네현 바로 위에 해당한다. 후쿠이는 감포와 위도가 비슷하고 바다 환경도 유사해서, 가자미, 게, 고등어가 유명하다. <후쿠이현사>에는 후쿠이에서 19세기말부터 어업, 원양어업이 발달하여, 특히 홋카이도와 조선으로 어업을 확장했다고 전한다. 이는 개별 어민의 진출이 아니라, 지방정부가 현비를 지원하여, 진출지역을 조사하고, 유망하면 보조금을 주어 이주어촌을 만드는 식이었다.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1900년대(메이지 30년대 후반)부터 후쿠이현에서도 조선 해역 출어가 시작되었다. 앞바다어업 장려를 위해 현비로 건조한 개량 어선을 어업인에게 대여하여 1904,5년도에 조선 해역에서 조업 시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이 조업 시험이 유망함을 인정하고 현은 1906년 원양어업 장려금 하부 규정을 제정하고, 이 해역에 출어선에 대한 보조금을 교부하기로 했다. 1908년에는 조일어업협정이 체결되어 조선 연안 전 해역에서 일본인의 조업이 가능해진 점과 이 협정 동시에 발포, 실시된 조선어업법에 따라 일본인에게도 조선인과 같은 어업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된 점 등이 맞물려 사카이·뉴군·난조군에서도 이 해역 출어선이 증가하였다. 1909년부터 1919년까지 후쿠이현 어민이 획득한 어업권은 3건이다. (『조선수산개발사』,1954)


통조림 제조업 - 전복 및 게 통조림 제조가 가장 활발하며, 모두 내지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주요 제조장은 감포, 구룡포, 창포, 우산 등에 제조장이 있다. 전복 통조림은 한 번 내지 또는 부산으로 보내진 뒤, 다시 중국으로 수출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게 통조림은 이전에는 내지 및 조선 내에서 수요가 있었으나, 최근에는 미국으로 판로가 열리면서 활발히 수출되고 있다. 이외에도 최근 고등어 야마토니(주: 일본식으로 주로 간장, 설탕으로 양념한) 통조림 제조에 종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 고등어 생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장래가 유망한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경북산업지>,1920)


1909년 하야시(林) 조선통감부 기사가 후쿠이 현을 방문하여 현내 각지에서 이주어업 장려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 국내에 현수산조합이 관리하는 ‘보조이주어촌’이 건설되었다. 1914년도에는 이주어업장려금 150엔이 현비로 지출되고, 경상남도 방어진에 8호의 이주 가옥이 건설되었다. 감포에는 1914년 뉴군 시가우라무라 다쓰노 산노스케 등이 이주해, 채굴망·게자망어업에 종사하는 한편 게통조림 공장을 경영했다. 또한 1917년에는 기선 저인망 어업을 개시하는 등 감포에서의 일본인 경영 어업의 중심세력이 되었다.(『조선수산개발사』, 112-137).


그러나 각 현이 경쟁적으로 건설한 이주어촌은 후쿠이현을 비롯해서 결국 거의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그 요인으로는 어획물의 일본 수송시설 미정비, 조선인 어업인의 어장 진출로 인한 어획고 감소, 자금지도자 부족, 조선총독부가 어업권 허가에 통제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 (후쿠이현사 『福井県史』通史編5 近現代一, https://www.library-archives.pref.fukui.lg.jp/fukui/07/kenshi/T5/T5-3-01-01-05-05.htm)


후쿠이에서 온 다쓰노는 식민정책에 의해 집단이주한 첫 일본 어민 집단을 보여준다. 「조선시보」(1917.9.29.)에는 후쿠이 어업단, 이세구미 통조림제조소가 정주 목적으로 감포에 와서 고등어 유망어업을 활발히 전개한다는 기사가 있다. 성어기에 감포로 출어하다가 감포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기사에는 다쓰노가 감포 축항기성회 회장, 스와키가 부회장이 되어 항만 건설을 추진 중이라는 기사도 있어, 감포의 항만을 건축하는 데도 일조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1847호 (1918.10.3)에 보면 연일 군(延日君: 영일군)의 다쓰노와 스와키가 광업권 설정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니, 처음에는 광산개발도 시작한 듯하다. 이후 어업에서 돈을 벌어 ‘다쓰노자동차회사’도 세웠으니, 도이구치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업에 손을 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출신지인 후쿠이현 뉴군은 일본에서도 맛있는 게로 유명한 지역이어서 일찍부터 게어업과 게통조림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1928년 뉴군에 6개소, 후쿠이시에 3개소, 사카이 군에 1개소의 통조림공장이 있었다 (<福井県史 通史編5 近現代>) 현재도 <에치젠게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뉴군은 ‘에치젠 게’라고 해서 일본 천황가에도 진상되었던 게 산지인데, 동해안에서 잡히는 게와 같은 종류다. 보통 ‘홍게’라 불리는 게인데, 학명은 Chionoecetes japonicus Rathbun, 일본에서는 베니즈와니가니(ベニズワイガニ)라 불린다. 게다가 이 지역은 ‘에치젠 상인’이라 해서, 개성 상인처럼 근대이전부터 상인이 유명했다.


다쓰노는 출신지의 영향과 경험으로 조선에 와서도 바로 동해안의 ‘게’에 눈독을 들여, ‘간즈메(缶詰)’, 즉 통조림업을 시작하였다. 정착하기 이전인 1915년에 이미 감포에 다쓰노 통조림 공장을 설립하였고, 1932년에 휴업하였다. (<조선공장명부>, 1932)

지도에는 쇼와초 남쪽에 가게가 있다. 그 외에도 감포소학교 앞에 ‘다카무라통조림공장’이 있었다. 60대 이상 된 분들은 감포 시장 근처에 통조림공장이 있었다고 기억하니, 다쓰노의 통조림공장일 터이다. 해방 후에는 통조림공장이 조선인에게 넘어와 「대양상사」(주)감포통조림공장과 「대양수산」이 되었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 가공선>(1929)


통조림은 근대적 식량의 상징이기도 하다. 부패하지 않고 보존되며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한 먹거리. 서양에서 먼저 군용식량으로 개발되었는데, 일본에서도 러일전쟁(1904-5) 전후로 확산되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어업자들이 통조림공장을 만들어, 게, 전복, 정어리오일통조림, 꽁치, 고등어 등을 통조림으로 만들었고, 전복통조림이 특히 인기가 있었다. 게통조림도 일본의 특산품으로 미국에 파는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그 대부분이 동해에 면한 후쿠이, 홋카이도 등지에서 어획되었는데, 나중에는 조선으로 확대되었다. 육지가 아니라 선상에서 바로 게통조림을 만드는 방식이 1920년대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설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의 <게 가공선>(1929)이다. 일본의 게어업은 후쿠이, 홋카이도가 유명하고, 러시아에 면한 북쪽 오호츠크 해까지 진출하였다. 추운 겨울 바다에서 성어기 동안 육지에 내리지도 못하고, 선상에서 게를 어획하여 바로 가공하는 힘든 노동의 현장은 ‘지옥’으로 그려진다. 소설 첫머리는 ‘자아, 지옥으로’라는 저 유명한 대사로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시대에 이 소설은 프레카리아트(불완전고용에 놓인 노동자들)의 공감을 자아내어 다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게어업은 그만큼 힘든 중노동이었다.


동해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하여 동해의 품질 좋은 게를 일찌감치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도세 일반 경상북도>(1934)의 <수산물 제조물 종류 및 가격>에 보면 경상북도 어업은 경상남도, 전라남도의 뒤를 이어서. 전국 3위였다. 동해안의 풍부한 수산 자원은 여러 방식으로 가공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통조림 사업이다. 1931년에는 일본인은 통조림 320 상자, 4800원을 벌었지만, 조선인은 220 상자, 3,300원을 벌었다. (젠쇼, 1934:471)


감포와 구룡포 사이에 있는 항구 양포에도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했는데, 현재 우리나라 통조림 업계의 가장 오래된 업체인 샘표식품의 양포공장이 있다. 양포공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통조림공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근대는 일직선이 아니라 얼마나 굴곡지고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통조림 판매가 시작된 시기는 급격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다. 샘표식품 홈피에서 확인하니, 1976년에 생겼다고 한다. 통조림에 대해서 해방 후 1976년까지의 또 다른 기억이 있겠지만, 알 수 없다. 샘표식품 양포공장에서는 정어리·꽁치·바지락 등 수산물 가공 통조림을 생산했다고 한다.(강부연 「결코 가볍지 않은 통조림에 관하여」woman.chosen.com 2020-04-19 10:36 )

감포-양포간 해안도로는 1934년 3월에 개통되었다.(최부식, 2018:670) 어린 시절 기억에는 학교 가는 길에 본 샘표식품의 양포공장 통근버스가 있다. 1980년대 초, 시골 버스는 1시간에 한 대 다닐까 말까 할 때, ‘통근버스’라는 것이 있었다. 통학하려면 1시간 정도 걸어야 했기에, 이 통근버스가 하이칼라해 보이고, 시골에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동해에서 태평양을 건너 시애틀로


근대 일본인들의 수산업 발전으로 시작된 통조림은 멀리 미국 서부 해안 시애틀에서도 발견되었다. 시애틀은 자연이 잘 보존되는 곳이어서 연안을 조금 벗어나면 고래를 볼 수 있다. 2016년 우연히 작은 섬의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일본통조림과 마주쳤다. 일본이 고래를 잡아 통조림으로 만든 흔적이다. 20세기 일본의 포경선이 조선의 동해, 홋카이도, 알래스카, 시애틀의 태평양 연안을 돌았고, 그 흔적이 과거의 고래고기 통조림으로 남아 있었다. 연도는 불명확하지만, 사진에 있는 통조림캔에는 일본어로 각각 ‘조선불고기(朝鮮燒肉)-바베큐’,‘로스트 고래고기’, ‘리아스고래고기 야마토니(リアス鯨肉大和煮)’라 쓰여 있다. 각각 고래고기를 조선식, 서양식, 일본식 양념으로 조리한 통조림이다. 일본의 포경회사가 잡은 고래고기를 가공한 것인데, ‘조선불고기’ 맛으로 조리했다는 것이 식민지 조선의 바다에서 어업한 흔적을 상기시킨다. 고래어업의 전진기지라고 하는 방어진, 장생포가 가까운 때문인지, 1980년대에도 시뻘건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맛있었다는 기억은 없다. 하여튼 20세기 일본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사진-시애틀 고래박물관과 일본의 고래고기 통조림>

화면 캡처 2025-06-23 123351.jpg


현재도 동해안에는 곳곳에 게 판매장이 있지만, 여름철에는 금어기라서 러시아에서 수입된 게 들이 판매된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가 사과와 그물에 걸려 다리가 하나둘 끊어져 상품성이 없는 게를 맞바꾸어 실컷 맛보게 해 주셨다. 한 대야씩 가마솥에 삶아 먹었는데, 그 게 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천혜의 어장을 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