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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어장을 탐하다

by 뚜벅이

아래 사진은 1930년대 초 감포항의 모습이다. 사진 앞쪽으로 수많은 어선과 일본식 가옥이 보인다. 사진 왼쪽 산 아래에는 감포 신사의 도리이(鳥居, 필자주: 신사 앞에 세워진 관문.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가 보인다. 앞쪽으로 번듯한 건물은 감포금융조합이다.

<감포항 전경>

화면 캡처 2025-05-03 190053.jpg


동해안의 작은 해안가 감포에 일본인이 모여든 이유는 무엇일까?


水産

本道의 海岸線은 東部의 一部分으로 延長이 僅히 54里 25町에 不過하야 全 朝鮮 中 最短하나 魚族의 풍부는 實로 其 比가 無하다. 浦港, 江口, 九龍浦 及 甘浦의 4漁港은 世界有數의 良漁場이니 最近의 漁獲高는 約 490萬圓에 達하야 全 朝鮮漁獲高의 1割强을 占하고 (全南, 慶南의 漁獲高는 海岸線 1里에 平均 7,900餘圓이나 本道는 9萬餘圓에 達하야 畧 其 11倍 强이 되고 日本 海岸線에 比하면 畧 2倍 半 强이 됨) 漁獲物의 種類는 鯖, 鰊, 鱈, 太刀魚, 鰆等 30餘種과 其他 和布, 海蘿, 石花菜, 海苔 等이니 其內 漁獲高의 最多한 者는 鯖의 190萬圓 鰊의 87萬圓 鰆의 44萬圓, 鱢의 36萬圓, 鰮의 32萬圓이오 漁業에 專業하는 者는 朝日人을 倂하야 1,600戶 此外 兼業者 其他 從業者數는 2,300餘戶, 漁具의 總價格은 140萬圓에 至하고 且 水産製造物도 近來 現著히 增加되야 公用品의 乾製品과 肥料, 油*類, 海澡 등을 合하면 98萬圓에 達하니 本道 斯業의 進步는 實로 可驚하겠다.

(<朝鮮文化의 基本調査(其二), 慶北道號 上> <개벽> 제36호, 1923.6.1.)


<번역문>

경상북도의 해안선은 동부의 일부분으로 연장이 근근히 54리 25정에 불과하야 전조선 중 가장 짧으나 어족의 풍부함은 실로 비할 데가 없다. 포항, 강구, 구룡포 및 감포의 4개 어항은 세계 유수의 좋은 어장이니 최근의 어획고는 약 490만원에 달해 전조선 어획고의 10% 이상을 점하고(전남, 경남의) 어획고는 해안선 십리에 평균 7,900여원이나 본도는 9만여원에 달해 누계 11배 이상이 되고 일본 해안선에 비하면 2배 반 이상이다) 어획물의 종류는 고등어, 청어, 대구, 갈치, 삼치 등 30여종과 그 밖에 미역, 청각, 우뭇가사리, 김 등이다. 그 중 어획고가 가장 많은 자는 고등어 190만원, 청어 87만원, 삼치 44만원, 전갱이 36만원, 정어리 32만원이오. 어업에 전업하는 사람은 조선, 일본인 합쳐 1,600호, 그외 겸업자, 기타종업자수는 2,300여호, 어구의 총가격은 140만원에 이르고, 수산제조물도 근래 현저히 증가되어 공용품인 건조제품과 비료, 유*류(원문대로), 김 등을 합하면 98만원에 달하니. 본도 그 업의 진보는 실로 놀랍다고 하겠다.


자료는 경북의 동해안이 세계적으로 좋은 어장임을 소개하는 글이다. 밑줄친 부분을 보면, 포항, 강구, 구룡포, 감포의 네 어항은 세계 유수의 어장으로, 최근의 어획고는 전조선 어획고의 약 10% 이상을 점하고, 전남, 경남에 비해 11배 이상이고, 일본에 비하면 2배 반 이상이다. 어획물의 종류도 충부해서 고등어, 청어, 대구, 갈치, 삼치 등 30여종과 그 밖에 미역, 청각,우뭇가사리, 김과 같은 해조류도 풍부한 ‘세계유수의 호어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젠쇼는 이렇게 설명한다.


조석은 극도로 완만하여 간만의 차가 겨우 1/2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족의 회유 서식에 적합하고, 겨울에도 조업을 못할 우려가 없어, 연간 조업할 수 있고, 이면도로의 완성으로 경주읍 기타 오지 소비지와 교통편이 편리해지고, 또한 조선과 일본의 유수한 수산 집산시장인 시모노세키, 부산부 등에 근접해 어획물 운반판매에도 극도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각종 어족은 그 종류, 수량 모두 풍부해서, 이미 중요 수산물만 해도 약 50종, 어류 34종, 조개류 5, 해조류 6, 바다생물 기타 5를 포함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시되는 어류로, 고등어, 명태, 가자미, 광어, 상어, 전어, 갈치, 정어리, 삼치, 전복, 농어, 미역, 멸치, 우뭇가사리 등이 있다. (젠쇼,1934:456)


일본인들에게 조석간만, 기후, 물류와 도로의 편리성, 어족이 풍부한 감포는 ‘천혜의 어장’로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어업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전통적으로 농업국이어서 연안 어업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의 근대 어업이 발달하였다고 주장한다. 동해안은 천혜의 어장이었지만, 수심이 깊어 고등어와 같은 회유성 어군을 잡기 위해서는 장비를 갖춘 대규모 어선이 필요했기에, 자본력에서 앞선 일본인들이 조선의 어업을 장악해 갔다.


그들은 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아 조선 해역에서 아무런 제재없이 어획했다. 1921년 일본인에게 6개의 어업면허 허가가 났다. 경주군 일본수산주식회사, 이토(伊藤庄之助), 다쓰노(龍野三之助), 주식회사 오히데구미(株式會社大秀組), 마스오카(松岡益太郎), 스와카(洲脇樂造)가 어업면허를 취득했다. (<관보> 제2591호」,1921.4.4.)

그들은 어업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1921년 수산품검사소도 설립한다. 일본 가가와현은 조선해의 어장 개발과 어종 개량을 위해 조선 해안 곳곳에 ‘수산업시험소’를 설치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근대 국가 일본의 조직적인 조사와 관리와 통제를 보여준다. 근대 일본에서도 빈곤하고 영세한 일본 서부 어민들을 해외에 식민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고등어 유망, 기선저인망, 고등어 건착망은 그 발달이 현저하여 규모가 큰 것은 옛날과 비교되지 않는다. 즉 어선 조정, 어구 사용 등에 기계력을 이용하고 동력어선으로 먼바다 어장개척에 임하는 등 눈부신 진보를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중략) 일본인은 80척의 배에 640명이 승조하였고, 220,000원의 어획고를 냈다. 조선인은 8척의 배에 64명이 승조하였고, 32,000엔의 어획고이다. 10:1의 차이이다. (젠쇼,1934:457-9)


조선과 일본의 어업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기계와 동력 사용의 유무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면, 대규모 어업으로 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영세한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예를 들어,1931년 당시 많이 잡히던 고등어는 기선유망어업이 많았다. 경주군내 어업에 사용되는 어선은 1931년 현재 426척인데, 그 대부분은 일본식 발동기선이었다. 아래 표에 있듯이 대규모 조업을 할 수 있는 20톤급 발동기선은 일본인이 85척, 조선인은 겨우 10척이었다. 감포 앞바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어선수>(젠쇼,1934:461)



1930년대 감포의 항구 모습을 「부산일보」는 이렇게 전한다.


▲오징어 군집

금년 8월 말부터 감포를 거쳐 3, 4리 앞바다에 오징어가 군집하는 것을 발견하고 목하 수척의 어선은 오징어 전업에 종사하고, 매월 오륙백부터 이삼천의 오징어를 잡았다. 고등어 유망은 고등어 그물을 펼치는 한편, 오징어를 잡고, 이 또한 매일 밤 수백을 잡는다. 오징어 어장으로서 인정되어 후쿠이 어업단은 23척의 어선으로 크게 어획하고 있는데, 내년도부터는 수십 척을 증가시켜 마른 오징어를 제조할 계획에 있다.


▲고등어 시기

오히데구미사업소 및 창고는 거의 낙성되고 일본수산주식회사의 대규모 사무소 및 고등어평(鯖坪) 등은 낙성중에 있고, 고등어 유망 및 박망을 속속 들여와서 요리점, 음식점 등은 갑자기 경기가 좋아져서, 작부를 구하기 위해 부산 왕복이 빈번하다. 요리점이 여러 있다. 후나야, 산요테이, 다이니산요(산요테이의 분관), 호라이테이, 다지마루, 고야나기테이, 히노데루 등이 있다.

(「부산일보」1933.11.09.)


1920년대부터 감포는 삼치, 고등어, 정어리 순으로 회유성 어군들이 대량으로 어획되고, 오징어도 많이 잡혔다. 후쿠이현은 게, 오징어, 가자미가 유명한 곳인데, 후쿠이어업단은 후쿠이에서 감포로 이주한 ‘집단이민’이다. 1933년에는 기사에 보듯이, 감포 시가지는 돈이 넘쳐나고, 유흥가가 형성되어 부산까지 유곽에서 일할 작부를 구하기 위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1930년대 지도에는 많은 요리집, 여관 등이 보인다.


원래 어자원이 풍부한 감포이지만, 조선 연안에 수십명 단위의 일본인 집단이주어촌이 형성되면서부터 고등어 어업이 발전하였다. 늦봄에 한꺼번에 많이 잡히고 부패하기 쉬운 고등어 어업은 모선 2척, 종선 2~4척, 어부 30~40명이 필요한 대형어업으로 준비를 할 수 있는 장소와 어획된 고등어를 제조할 수 있는 어업근거지가 먼저 선점되어야만 했다. 어업근거지에는 고등어 어업에 필요한 얼음제빙소, 고등어 염장고, 철공소, 어구 부속품 등을 파는 상점과 어민들이 쉴 수 있는 목욕탕, 이발관, 당구장, 술집, 음식점, 요정 등이 생겨나 어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방어진, 감포, 구룡포 등지에서는 화려했던 일제 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김수희, 2005:173-186)




그럼에도 이러한 항구의 발전은 대단히 불균등했다.


성어기 어장의 변동에 따라 어업자들이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고, 그것을 따라 상인들이 뒤를 따르고, ‘바라크로 가설주택을 만들어 일용품, 요리점, 음식점, 목욕탕 등을 전전하여 이동하는 자가 많은데, 근래는 어항 및 어촌 부락의 발달과 어획물의 중매업이 활발해져서 이런 종류의 계절상인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는 경향이다. 겨우 수 년 전까지 방어진, 감포, 구룡포같은 지역은 이러한 통어부락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는 정착어업자에 의해 훌륭한 어항과 시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수년간에 걸친 불경기와 어업의 부진으로 각지의 어항 및 어촌의 피폐가 심하고, 어민 및 일반 상인은 대단히 곤궁에 빠져 있다. 일반 어업자의 통어 외에 제주도의 해녀도 연안 각지에 봄 초부터 가을 끝날 무렵에 걸쳐 계절적으로 출어하고 있고, 이들 해녀 중에는 어촌에 일가를 이루고 정주하는 자도 적지 않다. (젠쇼, 1933:783)


1930년대 감포는 통어자들이 계절적으로 드나드는 항구에서 정착한 어민이 늘어 현재 감포읍내 중심으로 이주어촌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이상한 점은 192, 30년대 동해안의 어업이 활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촌이 피폐해졌다고 지적하는 점이다. 자본이 있는 대규모 어업자들은 수익을 내지만(총어획고의 40%), 영세한 어민들은 기본적인 생활도 어려울 정도로, 일본인 어민 안에서도 격차가 커지고 부가 균등하게 배분되지는 않았다. 거대자본에 의한 어업이 영세한 일본 어민들도 빈곤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젠쇼는 어촌의 피폐와 빈곤을 를 근본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

① 어업조합의 충실개량을 꾀하고 영업자로 하여금 용이하게 생산자금을 얻게 함과 동시에 고리대에 시달리는 소어업자를 구제하고,

② 또한 어획 및 생산품의 판매통제를 강구하고 일부 상인의 이익농단을 제어하며 생산자를 보호하고,

③ 어업에만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농업, 기타 부업을 하게 해서 종래와 같은 단일 수입의 폐를 피하게 하고,

④ 현재 각지에서 생산되고 있는 통조림, 정어리기름, 토마토사딘, 기타 수산공업을 진흥 장려하고,

어항의 수축, 항로개척, 철도 및 도로의 개통으로 교통기관을 완비하는 등 경제상 많은 시설이 남아있다. (젠쇼,1933:800)


결국 식민지로 이주한 영세 일본 어민도 조선인 영세 어민들도 고리대에 시달리고, 어획물을 운반하여 판매하는 운반업자나 중개상만 큰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일본인의 조선 어장 개발 이래, 조선인들도 일본식 어업에 진출하고, 어업기술을 습득하였지만, 유독 고등어와 정어리건착어업만큼은 끝까지 조선인이 손을 대지 못하고 일본인이 독점한 사업이었다.(요시다 케이이치 저, 김수희역:437) 건착어업은 배와 배에 큰 그물을 이어 고등어 떼를 포위해 대량으로 잡아들이는 방식이다. 고등어나 정어리는 회유성 어군으로 일시에 수확되고, 처리해야 하는 특성상, 대자본과 저장고, 가공에 필요한 부대시설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趣味の慶州�1931)


위 사진은 거중기로 배에서 어획한 해산물을 부두에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어획된 해산물은 부두에 면한 감포 어시장에서 팔려나갔다. 어시장은 경주군내에 2개소, 감포와 양남에 각 어업조합의 위탁판매소가 있었다. 그러나 감포에서 어획된 생선은 주로 일본 시모노세키 및 부산, 대구, 서울 방면으로 보내고, 양남의 생선은 경주, 울산 방면으로 보내졌다. 1931년 감포어업조합이 거래한 양이 391,460원인데, 양남어업조합은 2,804원으로, (젠쇼,1934:473) 약 139배의 어획고 차이가 났다.


이렇게 풍부한 수산 자원 덕분에 식민이주어촌 감포의 일본인은 번성했다.


화면 캡처 2025-05-03 192320.jpg <사진-경상북도 경주군 양북면 감포항>(<趣味の慶州>1931)


감포 어시장은 생선을 사고팔려는 인파로 붐비고 활기에 넘쳐난다. 다음 사진은 어판장에 운반된 대량의 고등어떼가 렌즈에 포착되었다. 1930년대 감포의 어업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증명하지만, 저 고등어 노다지가 조선인의 부가 되지는 않았다. 앞치마를 두른 여성은 일본인 여성이고, 뒤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은 고등어를 손질하는 조선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은 기선건착망 경영자로 상승하고, 조선인은 영세 어부 또는 일본 어선의 어부로 고용되었고, 어획된 고등어는 주로 조선인들이 고등어 배를 가르고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화면 캡처 2025-05-03 192711.jpg 사진-감포어시장>(<趣味の慶州>1931)


감포의 일본 식민이주의 역사는 구룡포의 역사와 거의 시기와 출신, 방식이 겹친다. ‘하야시가네구미(林兼組)’와 ‘야마가미구미(山神組)’가 그 증거이다. 둘 다 조선에서 거부를 쌓은 유명한 일본인 수산업자이다. 나카베 이쿠지로가 이끄는 ‘하야시가네구미’ 상점이 1905년 석유발동기를 장착한 운반선 신세이마루(新生丸)를 건조하여 1907년 처음 도착한 곳이 구룡포이다. 발동선은 시모노세키까지 3일 걸리는 선어 운반 시간을 25-6시간으로 단축시켰다. 해산물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는 형태뿐 아니라, 얼음을 채워 빙장 운반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야시가네구미는 한반도 연안 곳곳에 지부를 두고 운반업과 어선어업을 직영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최대수산업체로 성장했다고 한다. (박정석,2017:345-367) 현재 구룡포 공원 내 신사터 수반의 후원자 명단에 하야시가네구미의 상호가 새겨져 있다. 하야시가네구미는 구룡포뿐 아니라 감포에도 진출했다.


야마가미구미(山神組)도 감포에 들어온 유명한 일본인 운반선 업자로, 남해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야마가미구미는 1917년에 대일본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해방후 일본에서 ‘대일본수산주식회사’라는 동명의 거대수산업체가 되었다.

<일제 침략하 한국 36년사> 「수산업정책」편에는 일본인 수산업자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다. 하야시가네구미나 야마가미구미같은 일본인 어업 자본들은 1920년대 말에 개발된 고등어 건착망 어업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나아가 고등어 건착망 어업은 개발 이후 동력선을 사용한 기선건착망 어업 일색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일제 시대 후기에 유명하였던 정어리 기선건착망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정어리 기선건착망과 함께 근대적 대규모 어업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명태 기선저인망 어업에도 부산에 있었던 일본인 회사인 조선식산회사 및 하야시가네구미를 비롯하여 여러 일본인 자본가들이 투자하였다. 다만 둘 다 1930년대 감포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 때는 오히데구미가 가장 세력을 넓혔던 것 같다.


동해안은 황금어장이었기에, 해방 이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교섭 과정에서도 ‘어업권’을 두고 한일간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렬과 교섭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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