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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만한 당신 Jul 17. 2023

제목없는 어느날의 일기

230717

일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내 서투름을 마주하게 된다. 

성급하게 말하지 말아야지, 신중해야지,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고 숙고해야지, 순간의 기분으로 상대에게 오래 인상에 남을만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내가 제일 잘 한다고 잘 안다고 오만하게 굴지 말아야지, 순간 기분 나빴어도 별 것 아니었는데 그냥 허허 털고 웃고 넘어가버릴 걸,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할 걸, 조금 더 찬찬히 살피고 결론을 내렸어야지-


내가 조금 더 괜찮은 나였으면 해서 자꾸 속상하다. 




절기 편지를 쓴다던 팀원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지점에서 돌아보고 챙겨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계획적이든 혹은 불시든-그게 체크리스트나 점수표로 대변되는 채찍질이 아닌, 나에게 쓰는 편지의 형태라는 게 다정했다. 내가 나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고, 과거의 나를 조금 객관화해서 바라보면서 잘해왔던 것 아쉬웠던 것을 쓰고 응원을 담고 바람대로 잘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긍정의 말을 쓰는 일. 으레 편지라면 그런 애정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올해 벌써 몇 번의 절기를 흘려보냈더라. 

소한, 작은 추위의 날

대한, 큰 추위의 날

입춘, 계절의 시작 봄이 들어서는 날

우수, 내리던 눈은 그치고 비가 오는 날

경칩, 벌레들이 깨어나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땅 밖으로 나오는 날

춘분, 둘로 나눈 봄의 한 가운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

청명, 따뜻하면서도 맑은 그야말로 화사한 봄을 알리는 날

곡우,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맞으며 새싹이 움트는 날

입하, 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의 시작

소만, 식물의 푸르름이 조금씩 대지를 덮는 날

망종, 씨를 뿌려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날

하지, 여름의 한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

소서, 작은 더위의 날


이렇게 많은 절기가 흘러갔다. 작은 추위와 큰 추위를 지나 일년이 한 바퀴를 돌아 작은 더위의 날을 만나고, 이제 곧 큰 더위의 날이 온다. 대서에는 기필코 편지를 써야겠다. 


지난 이별과 지난 사랑을 슬퍼하며 보낸 나를 위로해야지.

잘해내고 있다며 속으로 뻐기다가도 자꾸 못나져서 속상했던 나를 다독여야지. 

잘 풀렸으면 하는 일에 막히고 좌절하고 그래서 낙담했던 나를 응원해야지.

여기까지 해내 온 나를 칭찬해야지. 

도전하고 적응하고 고민하며 성장하고자 배우고자 애썼고 또 그러했던 나를 누구보다 기특해해야지.

소중한 사람들과 나눈 시간을, 경험을, 즐거움을 더 많이 기억해야지.

노력하고 싶은 것들, 해내고 싶은 것들을 다짐해야지. 

시도하고 지속하자고 격려해야지. 

내게 올, 나를 기다리고 있을 좋은 것들을 헤아려야지.



올해 남은 절기의 이름을 입 속에 굴려본다. 

입추, 사색의 계절 가을이 시작되는 날

처서, 한 풀 꺽인 더위를 마주하는 날

백로, 일교차가 커지면서 이슬이 맺히는 날

추분, 가을의 가운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한로, 이슬도 차가워지는 날

상강, 서리까지 내리는 날

입동,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날

소설, 많지는 않아도 눈이 내린다는 날

대설, 눈다운 큰 눈이 내린다는 날

동지, 겨울의 절정. 추운 겨울 밤이 길고 긴 


그러고 나면 다시 작은 추외와 큰 추위가, 그렇게 또 새로운 해에 익숙한 절기들이 돌아올테다. 

돌아오는 절기에는 또 조금 다른 내가, 마음도 외양도 내 마음에 흡족하게 아름다운 내가, 외연이 넓어진만큼 속도 단단해진 내가, 더 다정하고 친절하고 더 자주 웃고 더 기쁘고 더 행복하고 더 감사하는 내가, 덜 흔들리고 덜 낙담하는 내가,  더 사랑하고 더 사랑받고 더 안전하고 더 풍족하고 더 충만한 내가 있기를. 


수많은 '내가'로 이어지는 바람들이 참 욕심도 많다 싶지만, 그렇게 더 나은 나를 기대하는 내가 꽤나 괜찮다 싶다. 


* (출처) 절기 https://data.kma.go.kr/climate/solarTerms/solarTerms.do 서술된 절기의 내용을 내 입 속에서 굴려지는대로 다듬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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