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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만한 당신 Nov 24. 2020

그때여야만 했는데

곳곳에 묻은 너의 흔적들

퇴근길, 돌담 모양새를 흉내 낸 시멘트 길을 따라 걷다 인도와 차도 경계선에 죽 늘어선 홍가시나무 화단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쯤이든가 봄이 오는 초입에 여린 붉은빛을 띤 어린 잎사귀들이 네모 반듯이 정리된 화단 사이로 삐죽거리며 인사하듯 돋아났었다. 그때에 꽤나 좋아했던 선배와 통화하며 홍가시나무에 새잎이 났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다. 봄의 미열 같은 것인지, 오래된 호감 때문이었는지 상황에 맞지 않게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들뜬 목소리로 해버려서 선배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나도 그냥 웃어넘겨버렸던 것 같다. 이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홍가시나무 화단 길에 그 선배가 나를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통화를 했던 서툰 마음과 감정이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런 추억의 장소가 곳곳에 있다. 여전히 마음이 머물고 있는 장소는 집 앞의 방파제이다. 매일 지나쳐야 하는 장소인데도 질리지도 않고 매번 그 장소를 공유했던 상대가, 함께 나눴던 대화가, 그때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서울 사람이었던 탓에 내가 서울로, 상대가 부산에 번갈아 오가면서 친해졌는데 부산에 오면 꼭 함께 했던 일이 해변 근처에서 술을 한 잔 하고, 해변을 따라 영화의 거리라고 이름 붙은 단정하고 넓은 길을 삼사십 분 남짓 천천히 걸어오며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집 앞에 도착하면 괜히 서성거리다 방파제에 앉아 또 한두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을 만큼 편하고 자연스러웠던 관계였음을 기억한다. 한때는 무르익어가는 관계였는데, 이제는 연락도 머뭇거리게 된 그 사람. 잘 지내고 있을까?



머물렀다가 떠나버린 감정과 관계를 상기시키는, 예를 들면 홍가시나무 화단 길이나 집 앞 방파제 같은 장소를 지나칠 때마다 ‘그때여야만 했던 것’들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때 괜히 재거나 고민하지 말고,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 상대의 마음은 어떤지,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솔직할 걸, 마음 가는 대로 좋아할 걸,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후회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이 그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상황을,  상대를, 우리의 관계를, 그리고 무엇보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마음까지도 달라지게 만든다. 


여전히 나는 추억 어린 곳들을 지난다. 그 장소 그리고 그 장소에 묻어있는 추억과 감정은 여전한데, 너무나 많이 바뀌어버린 것들을 알아차리면 문득 엉엉 울고 싶어 지기도 한다. 붙잡고 싶은 순간들이 무심하게 흘러가버린 것이 서글퍼서. 그때여야만 했는데,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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