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을 좋아한다던, 너에게
“겨울이야”
며칠 새 부쩍 차가워진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곤, 너는 말했다. 늘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너였다. 가을에는 구름 한 점 없어진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이 높아졌다’고 말하고, 봄에는 ‘텁텁한 흙냄새 같은 거 나지?’ 라며 계절의 냄새를 조잘댔고, 여름에는 ‘해가 진~~ 짜 길어졌어!’라며 신나 하곤 했다. 나는 너의 말이 알아들어지기도 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기도 했다. 그런데 차가워진 바람을 킁킁대며 ‘겨울 공기야’ 할 때만은, 언제나 무슨 뜻인지 알았다. “응, 진짜 겨울 공기네.”
너는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며, 꼭 그때마다 이유로 나목을 댔다.
“나목?”
“응, 헐벗은 나무 말이야. 나무기둥이랑 가지만 남은.”
너는 나목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 때는 벚꽃으로, 한 때는 푸르른 잎으로, 한 때는 어떤 열매로, 색색의 단풍으로 화려했을, 그리고 그 화려함을 좇아 들락거렸던 개미와 벌들과 나비와 때로는 북적거렸을 사람들까지 다 떠나보내고 기둥과 가지만을 남긴, 초라해 보이는 그 나무를.
“왜? 변태 같아.”
웃으며 말하는 내게 너도 웃으며 말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다 떨어트리고, 다 보내 놓고도 절대 놓칠 수 없는 하나는 꼭 붙잡고 지키고 있는 거 같잖아. 쓸쓸해 보여서 좋아. 덩달아 쓸쓸해져.”
“쓸쓸해 보이는 건 안 좋은 거 아니야?”
“응, 근데 그냥 자기가 선택한 외로움 같은 거지. 고독? 그냥 지금은 이렇게 혼자서, 혼자서만 보내고 버텨야 하는, 지나가야 하는 시기란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지. 이유를 알면 슬프지 않잖아. 서글프지도, 원망스럽지도, 그립지도. 겉으로는 앙상하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속에 품고 있는 그 단단함이 좋아.”
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네가 지금 견디고 이 시기의 너를 나목에 투영해서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네가 의식했든, 그렇지 못했든. 그렇지만 하영아, 사실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는 알잖아. 지금 이렇게 때로 외롭고 암담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지켜내고 있는 시기란 걸. 겉치장들을 다 떼어내고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본질적인 것들만 남겨두고, 꺼지지 않게 지켜내며 때로는 그냥 견디어내면서 보내고 있다는 걸.
나목들이 그리고 네가 견디어 내고 있는 이 겨울의 다음에는, 언제인지 알 수는 없어도 아마도 봄이 오겠지? 그리고 계절이라는 건 우리가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리든 무던히 견디든 관계없이, 무심히 흐르고 바뀌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 우리는 알잖아. 하영이 네가 그냥 버티어 내고 있는 이 시간들 속에,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웅크리며 보내는 이 시간들 속에, 너만의 단단함이 있다는 걸 나는 믿어. 그리고 나는 그게 무척이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