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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만한 당신 Jun 24. 2020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떠나는 사람, Homo Viator

20대 중반 시절,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고서는 "나는 나만의 것" 넘버를 주구장창 듣고 다녔다. 뮤지컬의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이라이트 넘버이기도 했지만, 그 노래의 가사에 담긴 엘리자벳의 호소를 마치 나의 삶처럼 투영했던 것 같다. 이런 내용의 가사였다. 


"난 싫어, 이런 삶. 새장 속의 새처럼. 그 어떤 강요도 의무들도. 내 삶은 내가 선택해.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난 이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노래의 가사에 이입하면서 "이 새장에서 떠날 것"이라고 다짐했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나'는 없고, 오로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만 살아왔다고 느끼던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다른 지역의 대학은 반대하셨다), 원하는 학과(진로가 유망했다)를 진학했다. 졸업하고는 부모님이 원하던 직업을 선택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안정적으로 살아왔다며 부러워할 때도, 내내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 부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았던 그 순간들에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고, 사실은 나 또한 이 삶을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이후였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서도 스스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어 실행한 최초의 시도가, 대학원을 진학한 일이다. 물리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는 것, 돈을 벌지 않는 학생의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 일을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것 등 두려움과 걱정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왔으니 학위과정의 결과나 그 사이에 겪을 감정적 여파에 대해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원망을 할 수도, 책임을 돌릴 수도 없었다.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 그제야 와 닿았다. 


<엘리자벳>의 주인공 엘리자벳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것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고 행복을 얻었다는 결말이면 좋겠지만, 아직 학위과정에서 허덕이고 있는 나는 나의 결정을 후회할 때가 훨씬 많다. "새장에서 살 수는 없다"라며 떠났지만, 막상 떠나보니 내가 있던 곳은 좁고 갑갑한 새장이었다기보다 따뜻한 온실이나 보금자리에 훨씬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원했던 직업이 사실은 몇 년 지내보니 직업의 안정성과 의미가 중요한 나에게 잘 맞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반대로 누군가는 안락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던 삶이 지나고 보니, 답답하고 감옥 같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만하면 괜찮다고 여겼던 음식이, 일이, 사람이, 경험이 뒤돌아보니 정말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머물렀던 공간, 직업, 사람,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감각과 평가는 그 장소와 시기와 멀어지고 나서야 명료해지는 것 같다. 그런 깨달음들이 늘 "떠나고 나서야" 찾아온다는 데 생의 서글픔이 있는 것이 아닐까. 멀어져야만 비로소 보이지만, 그때가 좋았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서글픔 말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이미 떠난 경험을 한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적으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머물지 않고 떠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는 결코 모를 것들, 그 공간과 시간과 사람들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아 나서는 존재를 가리킨다. 꿈을 포기하고 한 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작가의 글을 빌려 말하고자 한다. 떠나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떠안는다. 떠나는 길의 끝이 행복이나, 성공이나, 오래 원하던 모습 같은 것으로 매듭지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고작 과거의 삶과 나를 반추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사함이나 회환 같은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머물던 시간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그리하여 떠난 것, 그 일련의 마음과 실행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나는 믿는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사람은, 이제 예전의 자신과는 영영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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