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time
여름과 도망
계절이 반대인 호주에서는 서머타임이 시작되었다. 10월부터 이제 슬슬 여름이 온다. 이 따사로운 햇살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난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져 여름이 더 그리웠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엔 어쩐지 조금 더 용기가 생긴다.
다시 돌아온 시드니에선 곧 익숙해지긴 했어도 안정과 행복은 없었다. 목적 없는 버티기가 시작되고 몸도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나를 발견했다. 요가, 사람들, 익숙한 이 도시가 나의 무거운 마음을 금방 가볍게 만들지 않을까 기대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자 어김없이 또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젊음에 기대어 떠날 용기와 자유를 얻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 다닐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짓도 지금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후회는 없지만.
서른 살의 무게
나도 곧 만으로 서른 살이 된다. 해외에 살면서 굳이 나이에 의미 부여하며 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앞자리 수가 바뀐다는 건 인생에서 꽤 큰 이벤트인 것 같다. 애써 무시하고 싶지만 부쩍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중이다. 열정만큼 따라주지 않는 고장 나는 몸, 미세하게 선명해지는 주름과 다크서클, 어린 친구들과의 세대차이. 그리고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무서울 지경이다.
지치긴 하지만 사실 아직도 방황하고 싶다. 안정적인 직장, 집, 차, 돈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전문성과 커리어, 대기업, 안정감과 사랑을 선택하기에는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고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상상한 서른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Last round
특별히 이번 여름을 기록하고 싶은 이유는, 나의 오랜 목표이자 꿈이었던 여행과 해외생활을 슬슬 청산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떠돌이의 삶을 살고 있지만 정착의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비자가 끝나면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다. 이젠 호주든 어디든 외국에서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이곳에서의 정착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문화 국가지만 평생 외국인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민자들의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더 좁은 세상에서 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국 음식과 문화, 도시의 편리함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결국 나의 생활과 취향은 모두 한국에 있다.
한편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서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기에 다시 돌아갔을 때 마주해야 할 현실에 겁이 나기는 한다. 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일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그때와 다른 점은 정착하고 싶은 마음과 약간의 해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마지막 호텔에서의 일들을 기록하고, 요가를 하고, 사랑하고 싶다. 이번 여름이 끝난 뒤엔 좀 더 쓸모 있고, 유연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