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던질 수 없는 야구공
2008년, 롯데 자이언츠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등에 엎고 가을야구를 갔던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았었고 조성환, 이대호, 홍성흔, 가르시아, 강민호 등으로 구성되던 공포 타선으로 2000년 대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갈 수 있었다. 그 때 야구에 빠진 건 정말 큰 행운이다. 나는 야구에 푹 빠져 선수를 준비하고자 했고 학교에서 티볼을 하며 입문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 1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준비했다. 중학교를 다녔던 3년 내내, 방과 후에 항상 야구 연습을 했었고 마침 발이 넓었던 친구 덕분에 근처 중학교 야구부와 시합도 종종 할 수 있었다. 나는 유격수와 투수, 그리고 1번과 9번 타자를 겸하며 수비가 좋고 발이 빠른 선수였고 번트를 잘 댈 수 있는 작전 수행에 능했었다. 그렇게 준비하던 와중 대구에서 야구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접했고 우리는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탔다. 1승 1무 1패,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첫 대회를 마쳤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산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기차 안에서 받은 통화에서 원래 올라가야할 팀이 어떤 사유로 인해 못 올라갔고 우리 팀까지 기회가 왔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야구선수를 하지 말라던 신의 게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기회는 정말 준비된 자에게만 오고 간절한 사람들에게만 온다. 만약 그 때 너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끼리 그 자리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면 그 기회를 잡고 우승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최근 봤던 최강야구에서 본 좋은 문구가 떠오른다.
야구는 후회를 관리하는 게임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사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미치도록 좋아해서 실행했던 것이 없지만, '야구'만은 달랐던 것 같다. 중학교를 다녔던 3년 내내, 방과후면 항상 야구 연습에, 집으로 돌아오면 야구 경기를 보느라 바빴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하이라이트도 꼭 챙겨봤으며 플레이에 대한 분석도 꾸준히 진행했었다. 8개 모든 팀의 주전 선수들을 모두 외웠던 때니, 얼마나 내가 야구에 진심이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온전히 야구에 미쳐있었다. 그럼에도, 신체적인 한계에 부딪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만류했고 나 또한 웨이트는 거의 안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벌크업을 전혀 못했기에, 중학교 3년동안 가져오던 '야구선수'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야구를 접고 베이스가 없는 상태에서 올라간 고등학교 시절, 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교 1학년, 경영대에 속한 야구부, WHITE HORSE에 입단하게 된다. 어릴 때 야구를 못했다는 보상심리와 여기서 내가 가장 잘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과한 욕심은 부상을 낳게 되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투구자세와 웨이트를 전혀 하지 않은 약한 몸 덕분에 연습 투구로 약 80개가 넘는 공을 뿌리다가 어깨에 무리가 오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받아보는, '어깨 터널 증후군
평소에는 전혀 아프지 않다가 어깨에 무리가 가게 되면 아파온다. 한마디로 공을 던지기만 하면 아프다는 것이다. 나는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2016년 1학년 내내 공을 던질 수 없었고 그렇게, 투수로는 한 경기도 나갈 수 없게 된다. 거의 다 완치가 되었다고 생각한 지금도 많은 공을 던지면 어깨가 우리하게 아픈 통증이 남아있다. 사회인 야구를 하러 필드에 나가게 되면 나는 투수를 하고 싶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아픈 통증 때문에 열정적으로 공을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한 분야를 파지 못하고 다양하게 공부해보려고 하는 것도 이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학교 시절부터 다양한 공부를 하며 통계학, 경영학 등을 공부했고 방송부를 진행하며 디자인 툴을 학습했으며 정부지원사업을 통해 파이썬과 DB 관리에 대해 공부했다. 이 글을 보게 되는 많은 학생들은 한 가지 분야를 팔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