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기기 위해서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_19

by 빨간나무



남편은 막내가 아픈 뒤로 좋아하던 커피를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아픈 아이를 병원에 두고 얼굴조차 볼 수 없던 날들에 얼마나 애가 탔을까.


크리스마스날 쇼크로 쓰러져 급히 처치받았을 때, 오열하며 말도 잘 못하며 걸려온 내 전화를 받고 남편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핸들을 잡은 손이 계속 떨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와도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유리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깨어났다’는 말만 듣고, 얼굴도 못 본 체 돌아서야 했다.




그렇게 40여 일 입원하는 동안 남편이 거의 매일 병원에 왔다.


면회가 금지되어 있지만, 짐을 갖다 주러 몇 미터 밖에서 얼굴만 보고 가거나,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물건만 놓고 가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첫 치료과정이 끝나고, 무사히 아이를 품에 안게 되었다.


그때 이제는 커피 한 잔쯤은 마셔도 되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마시지 못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었던 때..





가장 가까이에서 간병하던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진단을 받은 이후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가혹한 치료과정에 힘들어하는 아이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기에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하루 종일 들려오는 의학용어와 치료 과정에 휩쓸려 정신이 없었지만 기록을 남겼다.


아기가 계속 보채서 아기띠를 한 채로 내려놓지를 못 했다. 허리와 어깨는 끊어질 것 같아도 두 손은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렇게 병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의 정신줄을 붙들 수 있었다.


아이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그때 나도 잠시 쉴 수는 있었지만, 씻거나 밥을 챙겨 먹을 겨를이 없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치료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모든 걸 끊었다.


모든 게 내 탓이었으므로. 네가 낫기만 한다면 나는 무너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삶을 누릴 자격이 내게는 없다고 믿으며, 내 모든 욕구를 거세하고 오직 아이 치료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결국 깨달았다.



끝내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즐거워야 아이를 돌볼 힘이 생기고, 지친 감정을 아이에게 쏟지 않게 된다.


우울과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고 아이 곁에서 웃기 위해서라도 나만의 숨구멍이 필요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막내가 잘 놀 때면 나도 쉬었다. 드라마를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며 힘을 냈다.



또, 남편의 배려로 처음으로 영화관에 다녀왔다. 아기를 낳고 키우며 9년, 영화관은 늘 사치처럼 느껴졌는데, 아주 평범한 일탈이 너무나 짜릿했다.


물론 집에만 있는 막내가 짠했고 미안했지만 너무 죄책감에 묶이지 않기로 했다.


치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더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제 또다시 항암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쉽게 지치지 않기로 다짐한다.


얼마나 긴 싸움이 될지 몰라도, 끝내 이기기 위해서는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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