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에 서서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_28

by 빨간나무


지난겨울, 막내가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지낸 날이 114일이나 된다. 외래 진료까지 합치면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계절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드디어 32주 코스의 ‘집중 항암 치료’가 끝났다.


그 후에 2년간 유지 항암치료를 받지만, 일반 아이들처럼 기관에 다니고 음식도 제한 없이 먹을 수 있게 될 수도 있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항암치료로 암세포가 사라져 관해가 유지되면서 혈액수치들도 정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먼저 그렇게 지내는 아이들도 보았다. 그래서 이 순간을 동경하고 갈망했다.



그러나

'고대하던 날’과 마주하자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내 마음은 조금 우울했던 것 같다. 자축해도 되는 걸까? 축하의 말들이 모래알처럼 껄끄럽게 들렸다.



솔직히 말하면 기뻐할 수 없었다. 학습된 불안이 내게 속삭였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마.’




케이크를 먹으면서 불편하고 불안했다.





교수님께 허락을 받고 치료 이후 처음으로 일반 빵집에서 만들어놓은 일반 케이크를 먹었다.


그런데 너무 불안했다.


‘먹어도 되는 걸까, 축하해도 되는 걸까...’


아이의 컨디션이 나아지고 있고, 혈액수치도 괜찮은 수준이 되고 있는데도 너무나 불편했다.



우울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자유시간을 주며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라고 했다. 그동안 못했던 일탈을 한 기분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상담센터에 신청하여 전화로 상담을 받았다. 상담사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라며 공감해 주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한 편의 영화 같다고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내 안에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엄청난 일을 겪으며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집중치료가 끝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실감 나기는커녕 모든 수치가 정상이 되지 않았고 아기의 머리카락은 계속 빠지고 있다. 처음보다는 건강해 보이지만 보통의 또래와는 다르다.



집중 치료가 끝났다고 해서 완전히 나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스러울 수밖에.



이 우울감의 큰 원인 중 하나는 내 책임이 더 늘었다는 점이다. 힘든 항암이 끝나서 좋지만, 병원에서 할 만큼 하고 이제 손을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매일 시간 맞추어 빠짐없이 약을 먹여야 한다. 투약을 못 해 효과가 없으면 내 탓이다.


또한, 2년간 더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우울했다. 아이가 아파서 잠시 내 일을 내려두었지만 간병과 육아가 지칠 때면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란 생각에 들었다.


하지만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조차 욕심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만약 내년에 내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막내는 매일 기관에 다녀야 한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12월생 아기를 내년 3월에 당장 입소시킬 수 있을까? 매일 항암제를 먹고 가끔 입원도 하고 머리카락이 빠진 백혈병 환아를?


병원 친구들은 나이와 상황마다 다르지만, 어떤 아이는 바로 기관을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당연히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너무 빨리 보내 자주 아프고 암세포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자책감에 아직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결정에 따라 나도 앞으로 더 쉬어야 한다. 휴직을 더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지만, 경제적인 부분도 걱정이고 아이만 보고 있는 상황이 때로는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런 우울감들은 내가 잘 헤쳐 나가야 할 부분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막내의 치료가 우선이다.


마지막으로,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가라앉는다.


2년의 유지항암치료 중에 혹은 치료 종결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발한 아이들을 보았다. 암세포가 다시 생겨나면 더 힘든 치료를 받게 된다. 생존율 역시 확 떨어진다.


재발이 되는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게다가 미리 걱정한다고 막을 수도 없다. 사실 통계상으로는 건강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더 많다.


그런데도 미래가 막연히 두렵고 무서워 지금이 ‘다시 시작’인 것처럼 느껴졌다.




10개월만에 모래놀이.. 그런데 너무 불안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나를 지치게 했다.


막내는 오랜만에 모래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데 나 혼자 불안하고 걱정해 웃을 수가 없었다. 모래를 만져서 감염이 되면 어떡하나? 다시 아프면 어쩌나? 모든 게 어려웠다.





변곡점은 두 번 미분 가능한 함수에서 그래프가 위로 볼록인 상태에서 아래로 볼록인 상태로 변하거나 그 반대로 변하는 점을 말한다.


우리는 지금 그 변곡점에 서 있다.


백혈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답이 없는 함수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소중한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을 겪었고, 난이도가 극상인 문제를 풀기 위해 끙끙대며 매달렸다.


수개월이 지나 드디어 한고비를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치료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갑작스레 허용된 것들을 누리기에는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우울했다.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지금 미진한 부분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날까 봐 겁이 나고 있다.



그러나 불안해하며 위축되기엔 막내의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근거 없는 불안은 스스로 다독이고, 아이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


그래서 지금의 불안과 우울은 인정하기로 했다. 불안해도 되고 우울해도 된다. 그럴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껏 기뻐하고 진심으로 즐기는 순간도 올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치료 결과는 좋은 편이다. 새롭게 또 잘 헤쳐 나가야 하지만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최고의 결괏값을 찾아내 이 지옥에서 탈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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