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립니다. 단, 그 대가는...
어라, 다시 오셨군요?
지금껏 계속 불편한 이야기만 들려드렸는데. 이쯤 되면 '이번에도 그런 얘기겠거니' 하고 예상이 되지 않나요?
설마! 그런 걸 기대하고 오신 건가요? 아하하~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음~ 왜 그런 거 있죠? 청개구리 심.보.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를 원하신다니, 왠지 이번엔 그 반대의 것을 들려드리고 싶은 걸요?
아, 너무 실망은 마세요.
여러분의 상상에 따라 결말이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으니...
자, 그럼 따라오시죠.
꿈과 모험과 환상이 가득한, '동화' 속으로.
인간들 사이에선 이런 얘기가 있다지?
'알라딘'이라는 어벙한 놈이 나쁜 마법사의 계략에 빠져 동굴에 갇혔는데, 거기서 웬 요술램프를 주웠다고. 그 램프 안에는 소유자의 소원을 무조건 세 가지 들어주는 '지니'라는 정령이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그런 램프가 어쩌다가 그런 동굴 안에서 뒹굴고 있었을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 사람의 자유의지를 조종하는 일,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 빼고는 다 해준다며. 그럼 그 소유자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거고, 비밀리에 대대손손 물려주며 세상을 정복했을 텐데?
하긴, 그 주인이란 자가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그래서 램프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 못하고 아깝게 썩혔을 지도.
아무튼, 그 얘기는 허무맹랑한 거짓이야.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냐고? 내가 그 이야기 속 지니의 모델인, 진짜 '소원을 이루어주는 정령'이니까.
거 겁도 없이 함부로 눈 반짝이지 말라고. 난 당신이 기대하는, 대가도 없이 소원을 막 들어주는 그런 근본 없는 정령이 아니거든.
그 결과.. 이렇게 볼품없는 노점상의, 보푸라기 가득한 모포 위에 진열된 신세가 되었지만.
여기가 어디냐고? 어디랬더라.. 지금껏 여기저기 흘러 다녀서 잘 모르겠네. 인간의 손이 닿는 건 하도 빨리 무너져서 말이지. 형체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인간 스스로도.
그나저나 날 찾으러 올 생각인가 본데, 아서라 아서. 당신은 날 감당할 깜냥이 안 돼.
와서 아무리 램프를 문질러 봤자 내 코빼기도 못 볼 걸. 이 노점상인처럼.
뭘,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나를 통해서 소원을 이뤘다간...
아, 잠깐.
"할아버지, 이 램프 얼마예요?"
... 아무래도 욕망의 희생양이 또 한 명 늘 거 같네.
어디 보자.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복장으로 봐선 회사원인가? 양복을 입긴 했는데 어째 허름해 보여.
안색을 보아하니 삶이 녹록지 않았을 거 같군.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표정이야.
음... 좋아. 내 주인으로서 흠잡을 데 없구먼.
어? 지극히 평범한 것처럼 들리는데, 왜 이 사람은 되고 당신은 안되냐고?
좀 복잡한데. 그걸 설명하려면 나 같은 정령이 왜 램프 따위에 갇혀 있는지부터 얘기해야 하거든.
귀찮기도 하고, 굳이 말하고 싶을 정도로 유쾌한 얘기도 아니고...
아, 알았어 알았어. 말해주면 되잖아.
자, 생각해 봐. 상식적으로 누구를 어디에 가두려면 보통은 그보다 더 강해야겠지?
고로 나를 가둔 자는 정령보다 위에 있는 자. 이름은 언급 안 할게. 또 그 양반의 노여움을 사긴 싫으니까.
아무튼 그 양반이 나를 이 램프에 가두었어.
왜냐고?
"알라딘"인가 하는 얘기에서 지니가 못 하는 세 가지가 나오잖아. 살인, 자유의지 조종, 그리고 부활.
즉 인간의 목숨과 의지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야. 왜냐면 그 두 가지는 그 양반이 인간에게 부여한, 그 양반의 영역이거든. 거기에 간섭하는 건 그의 권능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이, 나의 죄목이었어.
... 별로 유쾌한 얘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나는 죄의 대가로 '영원히 램프에 묶여 고통받는' 형벌을 받았어.
보통 영리한 양반이 아니야. 그 저주를 통해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 있거든.
하나는 나, 다른 하나는 나처럼 주제도 모르고 분에 넘치는 걸 탐하는 인간들.
어때? 이제 알겠지? 나의 주인이 되는 건 행운이 아니라 마지막 테스트란 걸.
그 테스트에서 건져진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전부 욕망에 눈이 멀어 제 발로 처형대로 달려가더군.
인간은 참 어리석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를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걸까.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게 놔둘 양반이었으면 애초에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겠냐고.
전 주인들은 끝에 어떻게 되었냐고?
죽었지. 모두.
아, 마침 새 주인의 집에 도착한 거 같군.
어디... 아. 예상대로 허름하네.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고시원?
한겨울에 난방도 잘 안 돼서 방이 아주 춥네. 어쩐지. 오면서 계속 기침을 해대더라.
어? 지금은 여름이라고?
'그쪽'의 '지금'이야 그렇겠지.
"콜록, 콜록..."
쏴아.
나갔다 왔으니 손부터 씻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만, 슬슬 나도 좀 깨끗이 해주지 않을래?
"먼지 투성이네. 때도 많이 끼었고. 어떡하지?"
어이, 너무 그렇게 뒤집어대지 말라고!
어쩌긴 어째. 그냥 천 같은 데 물 좀 묻혀서 닦아 봐.
"걸레, 걸레를 어디다 뒀더라.."
잠깐만, 걸레라니? 설마 바닥에 있는 그거..?
"어우, 냄새... 썩었나?"
우웩! 야, 다른 거, 다른 거 없어?
"안 되겠다. 그냥 대충 옷으로 닦자."
그래 잘 생각했다. 그래도 옷은 걸레보단 낫겠지...
어이, 그거 와이셔츠 아냐?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 관리가 엉망이어서 찌든 때가 많이 끼었는데? 하얀 와이셔츠에 닦으면 안 지워질 텐데? 물론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제 다시 입을 일도 없으니까."
응? 저건 또 뭔 소리야? 회사 그만뒀나?
뭐, 상황이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나한테는 좋지.
쓱쓱 싹싹.
"됐다. 한결 낫네."
처음으로 웃네.
그럼 이제 슬슬 나갈 차례인가.
펑!
"와, 깜짝이야!"
"주인님, 당신의 소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 예?"
"... 딱 보면 몰라? 대사도 아주 대놓고 노골적이었는데."
"누구세요?"
지금껏 참 다양한 반응들을 봐왔지만, 얼빵함으로는 가히 상위권이다.
"지니입니다만?"
"... 파란색이 아닌데요?"
빌어먹을 디즈니 같으니라고.
"지니가 무조건 파란색인 줄 알아? 지니는 원래 불로 만들어진 정령, 따라서 정해진 형체나 색이 없다고."
"... 아, 그렇구나."
"너 정말 알아들은 거 맞아? 전혀 신나 보이지 않는데?"
"왜 신나야 하는데?... 아, 소원을 들어주니까?"
무색투명한 표정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맞아. 그것도 무려 세 가지나 빌 수 있다고? 어때, 좋지?"
"세 가지?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어?"
"난 하나면 돼."
어라?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전 주인들은 세 가지 꼭꼭 다 빌던데.
그래서 최고의 환희를 맛보게 해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소원이야. 날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