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의 나라 (5)

by Outis

무려 반년동안 방치한 이야기, 이제 와서 뻔뻔하게 이어갑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말인 이야기니까 이전 스토리 모르셔도 괜찮습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면요, 삽화가 추가되었거든요!


우리 살롱 드 아무말의 이장님이시자 아티스트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AI로 그려주셨답니다! >_<

(감사합니다, 작가님!)


여러분, 어차피 스토리 다 잊어버리신 거 삽화 보러 다녀오셔요. (뻔뻔함의 극치)

근데 진짜, 안 보시면 후회하실 거예요. 넷플릭스 시대극 보는 것처럼 환상적이거든요.


프롤로그

1편

2편

3편

4편


그럼, 이야기 이어갑니다...






스프랑지 대륙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프란시아(Francia)'. 칼레도 앙글리아까지 타고 갈 배를 구하기 위해 스승과 사내는 프란시아의 항구도시 '칼레티(Caleti)'를 찾았다.


"뭐? 어딜 간다고?"


"칼레도 앙글리아요."


"거긴 악마의 시계가 있는 저주받은 곳이잖아? 농담도 작작하시지, 퉷!"


선장은 예사롭지 않은 두 손님이 몰고 온 악운을 내쫓으려는 듯 땅에 가래침을 탁 뱉고는,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바다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칼레도 앙글리아의 하얀 절벽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것처럼 스프랑지 전역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불리고 있는 민요의 가사와는 달리, 실제 '시계탑의 나라'가 있는 섬과 칼레티 항구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날씨와 체력만 허락한다면 맨몸으로 수영해서 갈 수도 있는 거리였다.


"장난으로라도 그 이름 부르지 마쇼. 저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뭣 같은 대우를 받는지 아오? 무슨 저주가 여기까지 뻗쳤다나? 고기를 잡아도 제값에 못 판다니까, 제기랄!"


다른 곳을 찾아가 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은 거절과 욕설만 얻어먹고서, 스승과 사내는 터덜터덜 거리를 배회했다. 둘이 한 으슥한 골목 어귀를 지날 때, 안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어떤 여인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메시으(Messieurs; 신사분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군요. 점이라도 보시지 않겠어요?"


벽이 만든 그늘에 숨은 여인은 검은 두건과 천으로 머리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빼꼼히 드러난 눈가에 주름이 없는 걸로 미루어, 사내는 그녀의 나이가 비교적 젊을 것이라 짐작했다.


'신비롭게 보이기 위해 얼굴을 가린 것까진 좋았다만, 그 흔한 점술 도구 하나 없이 손마저 옷 속에 집어넣고 있다니. 보나 마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어리숙한 여행객의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이겠지.'


사내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앞서 가던 스승이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덩달아 멈춰 섰다. 스승은 물끄러미 여인을 응시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럽시다. 나는 됐고, 이놈 점이나 좀 봐주시오. 아~주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거든."


'그런 건 점쟁이더러 맞추라고 해야지, 다 알려주면 어쩝니까?'


그는 못마땅해하는 제자를 잡아끌어 여인의 앞에 데려가 세웠다. 여인은 말없이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뒤, 그녀의 입이 있는 곳의 천이 살짝 파였다.


"조만간 큰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사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작 한다는 말이.. 아까 스승님이 무심코 흘린 정보와 점을 보려는 사람의 심리를 고려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잖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엉터리구만.'


여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완전히 어이를 상실한 사내는 여인을 백안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데로 가버리려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서, 스승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참으로 고맙소."


휙. 스승의 손을 떠난 돈주머니가 여인의 치마폭에 떨어졌다. 사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저 안에는 시계탑 수리비로 받은 돈 전액이 들어 있을 텐데? 묵직한 무게를 느낀 여자가 얼른 손을 꺼내어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녀의 하얀 손은 붉은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점쟁이. 형편없는 점괘에 사내는 그냥 가려 했지만, 스승은 크게 만족해 하며 두둑한 돈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진다.


"수고하쇼."


자리를 뜨는 스승의 뒤를 따르며 사내가 볼멘소리를 했다.


"미쳤어요? 저런 터무니없는 점괘에 그런 큰돈을 내다뇨?"


"내가 미친 거야 하루이틀 얘기는 아니고, 돈은 그만한 값을 하니까 낸 거다."


"그게요? 그런 소리 저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치. 어떠냐? 열받지 않냐?"


"설마.. 지금 저 약 올리자고 이러시는 겁니까?"


"어. 네가 열받아서 오늘 일을 절대 잊지 못하도록 하려고."


해풍에 시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스승은 칼레도 앙글리아의 하얀 절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기서 온 너와 달리 난 이곳 프란시아 출신이니까 말이다."


그 말에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프란시아.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 중부까지 세력을 뻗칠 정도로 강대했던 프랑크 왕국의 북쪽 지방.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프랑크 왕국은 갑자기 불거진 귀족 간의 세력다툼 및 부패의 심화로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더니, 결국 불안정한 후계 문제를 빌미로 여러 소국으로 쪼개어졌다. 그 과정에서 잦은 내전과 반란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 여파가 아직도 전 프랑크 영토에 남아 있었다.

전쟁통에 태어난 스승은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아에 허덕이며 절망하던 소년이었다. 선대 수리공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까. 목숨을 건진 그의 앞에는 평생 동안 따라다닐 고통과 그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프랑지의 전역에 숨어들어 그 어떤 나라도 칼레도 앙글리아에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힘의 균형을 조율한 자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며 그들의 피와 절규로 '안정'을 지켜온 배후 세력. 원수나 다름없는 그들의 기술을 지키고 이어나가야 하는 숙명을, 선대 수리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의 어깨에 지우고 말았다.


"아까 그 여자, 그리 오래 살진 못할 거다. 매독이 상당히 진행되었어. 얼굴을 가린 것도 아마 그 이유겠지."


깜짝 놀란 사내는 점쟁이를 만난 골목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의탁할 곳이 없어 몸을 팔았는지, 아니면 팔렸는지. 억양을 보니 이 지방 사람은 아니던데. 쫓기고 쫓기다 이런 막다른 곳까지 흘러든 걸 게야. 여기선 흔한 일이다만."


"... 그래서 의뢰비로 받은 돈을 다 주신 건가요? "


"그놈들이 준 돈을 계속 가지고 있자니 영 찝찝해서. 어차피 배도 안 구해지잖아. 넌 그냥 헤엄쳐서 가라."


"제가 물에 빠져 죽으면 어쩌시려고요?"


"너 혹시 '하늘은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는 말 들어봤냐?"


"그렇겠죠. 이겨내기 전까진 견디는 중이라 할 거고, 끝내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말을 못 할 테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끈질기게 살아남아. 아까 낸 돈은 그걸 위한 복채였다, 나의 깊은 뜻이었다 이 말씀이지. 으하하!"


평소와 같이 등을 후려치는 스승의 투박한 손길. 사내는 보일락 말락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시계탑과 시계탑이 다스리는 나라, 그 나라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소년. 몹시 증오스러울 텐데도 스승은 지금껏 그를 한 인간으로서만 대했다. 이번 일을 맡기면서도 '타인의 집념이나 대의 따위 상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결론 지어라'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스승은 탓하지 않으리란 걸,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그에 스스로가 만족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한창 상념에 젖어 있는 사내의 등뒤에서 웬 걸쭉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저길 헤엄쳐서 가려고? 들은 대로 진짜 미친 양반 들이로구먼, 허허."


스승과 사내는 말을 건 상대를 돌아보았다. 대낮부터 빨간 코가 비뚤어지게 취한 거구의 중년 남자가 낄낄 웃고 있었다.


"누구요?"


"흠! 골목의 점쟁이 여자, 마농(Manon)한테 대충 들었소. 괜히 물귀신 되지 말고 내 배로 가쇼."


"예?"


남자의 두툼한 손가락이 하얀 절벽을 가리켰다.


"내가 저기까지 태워주겠다고."





"Sir(나으리), 머무르실 숙소를 따로 마련하였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늦은 저녁. 처음 그 건물로 돌아온 사내를 진갈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맞이했다. 단정히 올린 머리와 갸름한 얼굴, 아래로 내리깐 눈과 거의 변화가 없는 표정이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 깐깐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총리 관저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유니폼이었다. 옷뿐만 아니라 그녀의 얼굴 또한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꼭 맞는 팔부분과 달리 넉넉한 원피스 품에 사내의 눈이 잠시 머물렀다.


"괜한 일을 하셨군요. 저는 아까 그 방도 괜찮습니다."


"총리 각하의 명입니다. 따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내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친에 대한 반발심으로 괜한 고집을 피워봤자 이 죄 없는 하녀만 난처해질 것이므로, 그는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는 아들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괘씸함의 표현인지, 숙소는 총리 관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수프향이 진동했다. 사내는 그제야 하루 종일 잊고 있었던 허기를 느꼈다.


"2층에 있는 방에서 기다리십시오. 금방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먹을 게요. 물론, 폐가 안 된다면..."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며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급하게 숨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하녀는 그 장난감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처한 기색이 그녀의 눈에 얼핏 스쳤다.


"위층이 편하실 겁니다."


"... 그럼 음식은 제가 들고 갈게요. 그건 괜찮죠?"


하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나으리'란 호칭이 사뭇 부담스러웠으나, 사내는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이편이 여러모로 서로에게 좋을 것이었으므로. 대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신세 지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하는 건 저죠.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마리(Mary)입니다."


과연. 낯익은 얼굴만큼 익숙한 이름이었다.


총리의 명을 받고 사내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한 여성. 그녀의 얼굴과 이름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네? 다음 편 있냐고요? 그럼요. 앞으로 계속 연재할 거랍니다. ㅎㅎ


네? 연재 주기요?


......... 죄송합니다. (_ _)




매거진의 이전글너무 일찍 도착한 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