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1세기, 싸늘한 금요일 밤>
삼각김밥과 컵라면 하나씩. 주인 놈이 내겠다던 한 턱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안 대고, 저녁시간 다 되어서 먹는 첫끼이자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끼니.
작은 편의점이라 실내에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우리는 기다란 간이 테이블 앞에 서서 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밖에는 나름 의자도 갖춘 테이블이 두 개나 있건만, 주인 놈은 나가서 먹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깥은 코트 깃에 깊숙이 코를 박고 눈을 가늘게 뜬 사람들이 총총걸음을 걸을 만큼 바람이 차가웠다.
정령인 나야 전혀 문제없지만 약해 빠진 인간의 피부에는 아마 칼날이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질 테다.
‘아닌가. 라면이 식으니까 나한테도 문제가 되려나’.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별 의미 없이 컵라면 뚜껑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젓가락 뜯는 소리가 났다.
주인 놈은 아직 익지도 않은 면을 몇 번 휘휘 젓더니, 아무 감흥도 없는 표정으로 후루룩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면을 끝내고, 이번엔 푸드파이터가 물에 빵을 적셔 먹듯이 라면 국물에 잠깐 반신욕 하고 나온 김밥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야말로 문화충격. 너무 경악한 나머지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걸 보고 주인 놈이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에이, 정령이나 돼가지고 칠칠맞기는."
“너 때문에 놀라서 그렇잖아. 며칠 굶었어? 아무리 음식이 저급해도 그렇지, 먹는 태도가 그게 뭐야? 넌 부모한테 기본적인 식사예절도 못 배웠냐?"
"...... 어. 그럴 여유가 없었어."
응? 주인 놈이 자기 얘길 꺼내다니 의외의 수확이다. 이 고생을 하는 보람이 있구나. 뭔가 뿌듯해서 나는 내 라면과 삼각김밥을 내밀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먹고 싶으면 내 것도 먹어."
"그렇게 많이는 못 먹는데. 그럼 이렇게 하자."
주인 놈은 새 젓가락 하나를 얻어오더니 내 라면을 절반 덜어갔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라면을 먹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뜨끈한 라면 국물을 마셨다.
"아..."
"좋다."
만족한 두 목소리와 두 개의 빈 그릇, 두 쌍의 젓가락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흐름이 나쁘지 않은데? 이 기세를 몰아서 좀 더 알아내 볼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너 돈 얼마나 있냐?"
"왜? 입맛 없다더니. 역시 부족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나라 술, 소주랬던가? 그거 좀 사가자고."
"... 술?"
"미리 축하해도 되잖아? 내일이면 이런 인생도 바이바이니까."
'이런 인생'이란 말에 주인 놈의 눈길이 빈 라면 용기로 향했다. 기름으로 붉게 물든 용기에는 스프 가루와 귀찮아서 다 끝내지 않은 파 조각 몇 개, 너무 가느다래서 볼품없는 일회용 젓가락 두 짝이 남아 있었다.
녀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쓰레기를 주섬주섬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잠시 후 소주 두 병이 든 봉지를 들고 우리는 편의점을 나섰다. 우리가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칼바람을 기꺼이 얼굴로 맞으면서.
"자, 건배."
편의점에서 얻어온 작은 플라스틱 소주잔 두 개가 톡, 부딪히자 투명한 물결이 잔잔히 일었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얼마나 센 술이길래 이렇게 작은 컵에 마시나 했더니, 생각보다는 순했다.
"그렇군. 소주는 이런 맛이구나."
"처음 마셔 봐?"
"술이야 여기저기서 많이 마셔봤지만, 소주는 처음이야."
"술 좋아하나 보네. 잘 마셔?"
"난 정령이라 취하진 않아. 그냥 음료수처럼 즐기는 거지."
"아, 그렇구나."
나는 다시 잔을 가득 채워 한번에 쭉 들이켰다.
"음~ 뭐, 나쁘지 않네."
그에 반해 주인 놈은 아직 첫 잔 그대로였다. 술을 잘 못하는지 그는 잔에 입술만 살짝 대었다가 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호, 술이 약하시다? 잘됐네. 취하게 만들어서 네놈에 대해 술술 불게 만들어 주마.'
나는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아하하! 사내자식이 깨작깨작 그게 뭐냐? 얼른 마셔! 이 어르신이 친히 한 잔 따라줄게."
"우와, 역시 어르신이라 그런가? 어떻게 우리 꼰대 부장이랑 하는 소리가 똑같냐."
주인 놈은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잔을 비웠다. 마시는 폼을 보니 아주 못 마시는 건 아니네. 게다가 회사 생활을 하긴 했다는 거로군? 나는 술을 따라주며 은근슬쩍 물었다.
"일은 그만둔 거야?"
"... 그런 셈이지."
"왜? 뭐 하려고?"
"아무것도 안 하려고."
"허. 진짜 막무가내네, 이거."
"하하, 맞아. 진짜 무계획..."
마치 그 안에 뭐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주인 놈은 내가 준 술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잔을 입에 대고 목을 뒤로 확 꺾었다. 하얀 얼굴과 목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크읍..! 이젠 계획이 필요 없다는, 흐흐흣, 거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추임새. 녀석은 이제 아예 병째로 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중간에 몇 번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그는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끈질기게 병을 놓지 않았다. 꼭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 같달까.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되려 내가 말릴 지경이었다.
"야, 좀 천천히 마셔!"
"으아! 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
털썩. 주인 놈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힘없이 늘어진 손에서 풀려난 빈 술병이 또로록 바닥을 굴렀다.
"... 이런."
깔끔하게 작전 실패. 이번 인간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손으로 주인 놈의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올라간 혈중 알코올 수치 때문에 정신을 잃기는 했으나, 의외로 멀쩡한 간이 필사적으로 해독을 하고 있는 덕분에 생명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쌕쌕. 날숨에서 술냄새와 아까 먹은 라면 냄새가 났다.
"야, 이빨은 닦고 자야지."
뭐야 이건. 꼭 내가 이 자식 엄마라도 된 거 같잖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긴. 다음 주면 돈이 넘쳐날 테니 죄다 금이빨로 바꿔줄 수도 있다. 소원이나 제대로 빌면 좋으련만.
주인 놈이 태평하게 잠꼬대를 했다.
"흐우, 따뜻해..."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언제부터 기침을 안 했더라?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연기가 없는 화염에서 만들어진 존재. 순수한 불의 정령. 내게서 나온 온기로 방과 몸이 데워진 건가.
나는 발로 주인 놈을 밀어 한쪽 벽에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대충 이불을 던지고서 반대쪽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파서 비행기 못 타면 안 되니까. 난 하루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거든."
딱. 손가락을 튕기자 인간이 만든 조악한 전등불이 꼬리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나는 가만히, 수풀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녀석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저것이 멈추는 때가 곧 나의 해방의 날이자, 또 하나의 족쇄가 내려지는 날이 되겠지.
네 마지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직은 좀처럼 상상이 안 된다.
"그때까진 건강하라고. 보다 흥미진진한 네 죽음을 위해서."
[첫 번째 번호입니다. 1.]
[두 번째 번호, 2.]
[세 번째, 3. 어, 이거 재밌는데요?]
[네 번째. 네, 나왔습니다. 4!]
[설마가 진짜일까요? 다섯 번째, 5? 5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마지막... 믿을 수 없습니다, 6!]
"다음 주는 쇼핑하느라 바쁘겠는데?"
나는 1부터 6까지 차례대로 찍힌 로또 티켓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뭘 사려고?"
무려 로또 1등 당첨인데, 주인 놈의 반응은 심드렁하기가 그지없었다. 나는 ‘그거야 당연하지 않으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옷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