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램프 9화

by Outis

로또 번호를 찍을 때 가능한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건 바로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번호를 고르는 거다.

45개의 숫자에서 무작위로 6개가 뽑힐 확률은 그 6개의 숫자가 무엇이든 어차피 똑같으므로, 나와 같은 조합을 고른 사람이 적을수록 당첨금이 높아져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부터 6까지 쭉 고르는 건 멍청한 짓이다. 의외로 이런 식으로 번호를 고르는 인간들이 많다는, 웃지 못할 이유에서다.


"그럼 넌 왜 그런 거야? 널 포함해서 1등이 21명이나 나왔잖아. 그 탓에 당첨금도 생각만큼 어마어마하지도 않고."


"우리 처지가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아서 좋을 게 없어서지. 안 그래도 이번 총상금액이 사상 최대여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아, 맞다. 너 신분위조범이었지."


"이 자식이... 그리고 액수도 그 정도면 충분해. 해리 리드 국제공항 직항 편도 2장, 쇼핑, 출국 전 넉넉히 2주일 정도 머물 호텔 비용을 다 충당하고도 여유분이 좀 남으니까."


"호텔?"


"그럼, 로또까지 됐는데 계속 이 집에 머물 줄 알았어? 짐은 어쩌게? 지금도 둘이 겨우 지내는데."


"네가 램프에 들어가면... 음, 아니다. 그러면 바로 떠나는 게 아니구나."


"너 한 번도 이 나라 밖에 나가본 적 없지? 해외여행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까 해리 리드 국제공항이랬나? 그게 어딘데?"


"라스베이거스."


"... 너, 설마?"


"뭐야 그 '설마'는? 설마 날 본분은 잊고 방탕하게 놀 생각만 하는 쩌리 정령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정확히 찔렸네."


"원래 들러야 하는 곳이라서 그래! 물론, 중간에 모자란 돈 충전도 해야 하고."


"결국 도박을 하겠단 거잖아."


"어허,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거야."


"그럼 우리 목적지는 어디야?"


참 빨리도 물어본다.


"데스밸리(Death Valley)."


"... 좋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


"... 그럼 쇼핑부터 할까?"


그놈의 ‘알라딘’ 소리 좀 그만 듣게.




"왜 나까지..."


허름한 옷을 말짱한 새 옷으로 바꿔주는데 고마워 하기는커녕, 한 장 한 장 걸칠 때마다 주인 놈의 다크서클이 짙어져 갔다.


"내가 말했지. 너 속옷부터 양말까지 싹 다 바꾸겠다고. 아, 저기 저 마네킹이 입은 것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와, 뒤끝 작렬... 근데 마네킹 따라서 입는 거 보면 너도 패션 센스는 그닥 별로인 게..."


"시끄럿! 그것도 계산해 주세요. 일.시.불.로."


"알겠습니다. 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안녕히 가세요, 고객님~"


"또 오세요, 고객님~"


이제 대충 한 스무 번째 가게. 광대 승천한 점원들의 콧소리가 한껏 섞인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 택시 기사에게 짐을 건네주고 차에 올라탔다. 주인 놈은 차에 타자마자 정신이 가출한 것처럼 넋을 놓았다.

운전석에 착석한 기사가 물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음... 그렇지! 기사님, 혹시 맞춤 양복 전문점 괜찮은 곳 아세요?"


리무진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는 창문을 내려 가게 외관을 훑어보았다. 딱 봐도 품위 있고 세련된 느낌이 만족스럽다.


"좋네요. 여기로 하죠. 야, 내려."


"난 안가."


"왜 안 가?"


"난 양복 있어."


"너 설마 그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가겠다는 건 아니지? 싫어. 절대 같이 못 다녀."


"그럼 따로 다니면 되잖아."


"그런 차림으로 카지노에 들어갈 수나 있을 거 같아?"


"영화 보면 사람들 막 티셔츠 입고 들어가던데."


"아 진짜! 잔말 말고 그냥 좀 따라와! 사준다는데도 말이 많아."


"피곤해애... 으흐으..."


"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서있기만 해!"


나는 싫다고 버티는 주인 놈을 억지로 가게에 끌고 들어갔다. 시련은 문턱을 넘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원래 쇼핑 체질이 아닌지, 아니면 특히 뭐가 더 마음에 안 드는지, 녀석의 투덜거림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악이었다.


"어머, 이 원단이 손님 피부톤에 딱이네요."


"저 이 색깔 싫은데요."


"그냥 입어. 이걸로 해주세요."


"네. 그럼 치수를 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재기 싫은데요. 그냥 사이즈 M으로 해주세요."


"하아. 저기, 잠시 종이랑 펜 좀.... 쟤는 이 수치대로 만들어 주세요."


"예? 그래도 제대로 재서 맞추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괜찮아요. 그냥, 그냥 해주세요. 나중에 불평 안 할게요."


참자, 참자, 카지노 입성을 위해!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그건 바로.


"네, 다 되었습니다. 6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어. 그렇게 오래는 못 기다리는데. 일주일 안에 해주세요."


"하하, 저희도 그렇게 빨리는 좀, 으훗, 곤란해요. 먼저 오신 손님들 예약도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음. 어쩌지? 일주일 뒤면 나가야 하는데."


"아, 출국하시나 봐요. 어쩌죠? 저희도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해드리겠는데..."


"그럼 열흘. 6주에서 열흘로 줄였으니 예약금을 4배로 드리죠. 어떻게 안 될까요?"


"손님,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손님께서 받으실 상품의 퀄리티에 대한 문제랍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님께 최고의 만족감을 안겨드리는 건 저희의 프라이드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그럼 10배?"


"꼭 필요하시다면 거기에 맞추어 만족을 드리는 것 또한 저희의 프라이드겠죠. 알겠습니다. 열흘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할 쇼핑을 다 마치고 우리는 호텔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손님, 이 짐들은 다 어디에 둘까요?"


"어... 일단 드레스룸에 놔두세요. 정리는 우리가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바빠 죽겠는데, 주인 놈은 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쓰러져 누웠다.


"야! 하여튼 버릇 남 못 준다고.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


"이따가아..."


대체 뭘 했다고 저렇게 피곤해하는데? 이동은 리무진 택시로 편하게 했지, 짐은 벨보이가 다 옮겨주지,


"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받아요."


"아, 감사합니다!"


돈은 내가 내지.

지가 한 게 뭐 있다고.


누구와 달리 깔끔하고 부지런한 나는 하루 종일 묻히고 다닌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5성급 호텔의 초호화 스위트룸은 욕실도 웬만한 방만큼 넓었다. 아, 이 얼마 만에 누려보는 정령다운 삶인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매끈한 자쿠지 욕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지금은 간단히 샤워만 하고, 거품 목욕은 이따가 천천히 즐겨야지.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밖은 벌써 깜깜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구경했다.


"... 별이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전깃불이 어두운 밤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한창 상념에 젖어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아직까지 소파에 그대로 누워있었던 모양인지, 주인 놈이 하루 종일 입고 다닌 옷을 그대로 입고서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몇 층이랬지?"


"100층."


저 옆얼굴. 저 표정. 말 안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거 같다.


"... 어때? 장관이지?"


"그러네."


"이런 거 보면서 계속 사는 것도 괜찮겠지 않아?"


이틀만 더 있으면 이 녀석과 만난 지 일주일째. 이런 꼬드김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거, 이젠 알 때도 되었는데.

조급한 성정은 어딜 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후의 시간은 허망하기 그지없이 흘러갔다. 호텔 스위트룸, 퍼스트클래스 비행, 초호화 음식과 와인. 웬만한 건 다 시도해 보았으나 주인 놈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 일단 첫 번째 소원부터 들어주고 보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나는 주문 제작한 양복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꽤 만족스럽다.


"역시. 옷걸이가 중요해."


주인 놈도 새로 맞춘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대충 눈짐작으로 잰 치수가 다행히 꼭 맞았다. 옷이 날개랬던가, 저렇게 차려입으니 생각보다 인물이 괜찮았다.


"꼭 귀찮게 이런 걸 입어야 해?"


저 주둥아리만 다물면 참 좋으련만.


"'Manners Maketh Man', 몰라? 다 입었으면 가자. 오늘 밤은 바쁘다고."


멋들어진 슈트, 아름다운 여자들, 황금빛 샴페인, 반짝이는 보석.

룰렛처럼 돌아가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 춤추는 적과 흑.

웃음과 탄식, 환호와 절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곳.


카지노.


확률이니 숫자 놀음이니, 그런 건 다 인간에게 국한되는 이야기. 나에겐 단지 하나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로열 플러시. 플레이어의 승리입니다."


"이거, 오늘은 운이 좋은데."


숫자도 기호도 룰렛도, 내가 원하는 그림의 일부.

내 앞으로 칩이 쌓여가자 옆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샴페인으로 입술을 적시며 슬쩍 주변 동정을 살폈다. 카지노 소속의 양복쟁이들이 이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기면 곤란하겠군.'


똑똑. 불리한 패가 들어올 걸 알면서 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딜러의 승리입니다."


"아... 내 운도 여기서 끝인가?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기 전에 그만 일어나야겠지?"


짝짝짝. 금세 딴 돈의 절반을 잃고 물러나는 내게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주인 놈을 찾아 카지노 안을 어슬렁거렸다. 녀석은 한 슬롯머신 옆에 서있었다.


"여, 얼마나 잃었어?"


좀 즐겨보라고 칩을 줘서 보냈었는데, 세어보니 칩이 그대로 있었다.


"뭐야, 게임한 거 맞아?"


"안 했어."


"지금까지? 왜?"


"내 돈도 아니고, 내 소원이랑 상관도 없잖아."


"뭐야, 딱딱하게. 그냥 덤이라 생각하고 즐겨. 그래도 돼."


나는 슬롯머신에 칩을 넣고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녀석이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누가 허락하는데? 네가?"


날 빤히 쳐다보는 저 눈. 여전히 마주하기 껄끄럽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내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손해를 보게 된다고. 더 이상 갚지 못할 빚은 지고 싶지 않아. 더욱이 이런 걸로..."


'이런 거'라는 말과 함께 녀석은 슬롯머신을 흘겨보았다. 반짝이는 불빛과 소리가 거슬렸는지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레버를 당겼다. 그저 슬롯머신을 잠재우기 위함이었겠으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7-7-7-7]


띵띵띵띵-!! 삐리링~ 삐리링~ 삐리리링~~


"... 어?"


"이런..."


잭팟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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