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세기, 별이 눈물 속에 녹아내린 날>
어두운 창고 안. 창가에 주저앉은 인영 하나.
바짝 말라 자꾸만 쩍 달라붙는 목구멍을 마름침으로 달래며, 파티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으음~ 으으음..."
척박한 사막에 뿌리내린 생명력이다. 고작 3일인 것을. 이 정도 허기와 목마름은 참을만했다.
그녀는 애달픈 눈으로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이걸로 세 번째 보는 밤하늘. 이 어둠이 걷히면 육신의 고단함에서도 자유로워지리라.
그래, 이 밤만 지나면.
파티마는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코끝의 시큰함은 사라졌으나, 저릿한 가슴까지는 미처 바람이 닿지 않았다.
창이라 해봤자 흙벽에 뚫은 구멍 하나. 그 투박하고 성에 차지 않는 액자를, 파티마는 고개를 살짝 돌려가며 요리조리 바라보았다. 가능한 많은 별을 눈에 담고 싶어서였다.
가능한 많은 목소리를, 가능한 많은 손길을, 가능한 많은 얼굴을, 기억하고 싶었다.
거대한 하늘을 담기엔 너무 작은 창. 20년 생애 중 너무 짧았던 만남.
혹 미련한 욕심이 마음을 벌려 아쉬움으로 채워질까, 파티마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좋은 것만, 그의 추억만 가지고 떠나자, 그렇게 다짐했다.
"나의 사랑.. 아데니움..."
어여쁜 가락을 입지 못한 떨림이 툭, 서늘한 흙바닥에 떨어졌다.
"얼굴만 못생긴 줄 알았더니 머리도 나쁘구나."
그새 잠이 들었는가. 꿈에서만 들리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꺼져가는 등불에 새 기름이 채워진 것처럼 파티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그가, 그날 모습 그대로 서있었다. 감히 어둠이 삼킬 수 없는 고결함,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바싹 마른 몸 어느 구석에서 나왔는지, 파티마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짜디짠 눈물에 그의 모습이 얼룩져 푸른 별처럼 일렁였다.
울음을 잠재우려는 웃음과, 웃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뒤섞였다. 그 탓에 하얗게 뜬 파티마의 입술이 바르르 떨었다. 주책맞은 입과 코를 손으로 가리면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 어떤 몰골인지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부디 밤의 어둠이 미운 자신의 모습을 가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슨 고집이야? 이대로 죽을 셈이야?"
파티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또르르.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저 목소리. 저 말투. 꿈이 아니다. 손으로 가린 입이 웃었다. 그저 좋았다.
"이럴 거면 내가 왜 살려준 건데!... 내가 괜한 짓을 한 거야?"
파티마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끝에 그의 음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내가, 괜히 살려줘서... 그래서 네가,"
"아니에요! 그 무엇도 정령님 탓이 아니에요."
그의 얼굴에 죄책감과 괴로움이 서린 걸 보고 그녀는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아버지의 괴롭힘과 마을사람들의 철저한 외면.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부 사막에서 그대로 죽었다면 겪지 않았을, 살아 돌아왔기에 겪은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지난 10년은 아픔보다 기쁨이 컸다.
"전 행복했어요.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추억할 수 있어서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어요."
"... 그럼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살아. 그럼 되잖아."
똑바로 응시해 오는 파티마의 시선을 피하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다독이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어째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마음 같아서는 방방 날뛰며 화를 내고 싶었고, 그녀를 붙잡고 빌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그녀가 미웠다. 일을 어렵게 만드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끝내 자신이 곧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그녀가, 그는...
"사랑? 너 따위 인간이, 나를? 하!"
떨지 마라. 드러내지 마라.
밤하늘에 뜬 은빛 낫처럼 그저 냉정해라.
"네 잘난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보여주지."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면서, 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곧 남편이 될 사내에 대한 연정으로 채워 넣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점점 애틋함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변할 때까지.
마침내 그 순간이 왔을 때, 그는 모래 속으로 떨어진 이슬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파티마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뭔가 어렴풋이 보였던 거 같은데? 굉장히 슬픈... 눈동자? 그럴 리가. 3일 동안 못 먹고 못 마셨더니 헛것을 보았나 보다... 3일? 내가 왜 3일이나 창고에 갇혀 있었지?'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때, 파티마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3일 뒤면 그가 온다 했는데, 그럼 오늘이다!
파티마는 얼굴을 감싸 쥐고 펄쩍 뛰었다. 이런 몰골로 어떻게 그이를 맞이한담. 난 어쩌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녀는 잠겨 있는 문으로 달려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아버지!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문 좀 빨리 열어주세요, 네?"
한참을 두드려 봐도 밖에선 도통 대답이 없었다. 파티마는 고개를 돌려 뒤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주변이 밝아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그이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어서 꺼내달라는 파티마의 외침이 바람에 날리고, 바람에 스친 모래가 구슬피 울었다.
<2천여 번의 새해가 기록된 후>
- 나의 사랑.. 아데니움...
눈앞에서 다섯 개의 붉은 꽃잎이 잘게 떨리다 아득해진다. 빙글빙글 춤추며 떨어진다.
[어, 떨어뜨리면 어떡...]
쨍그랑.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겹친다.
- 으아악!
- 꺄아악!
- 으아앙!
귀를 막았다. 시야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숨과 함께 내려앉은 눈길에 조각난 날카로움이 걸린다.
-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너 왜 그래?]
- 당신들이 침묵하시기에 내가 죽였습니다. 그게 죄입니까?
[야, 괜찮아?]
- 그게 죄라면, 나는..!
"야!"
"... 어?"
2천 년 밑으로 떨어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끌려온 느낌. 주인 놈이 움켜쥔 어깨의 감각이 날 현재로 데려왔다.
그는 말없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가 묻자, 심각하던 그의 얼굴에 실소가 어렸다.
"하, 나 참. 안 어울리게 갑자기 멍해져서 사람 걱정시켜 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깨진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거 어쩌냐? 아까 그 사람이 보면 속상해할..!"
화르륵. 나는 조각난 거울을 불태웠다. 거울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이럼 됐지? 어차피 너도 갖기 싫다고 했으니까."
"야,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그만 가자. 택시 왔겠다."
안 어울린다고?
그래. 안 어울리는 짓 그만해야지.
빨리 이 녀석의 첫 번째 소원을 들어주고, 나머지 두 개도... 뭐든 상관없어.
이젠 귀찮아. 얼른 다음 인간으로 넘어가고 싶어.
증오스러운 인간들의 숨통을 끊는 것. 나한텐 그거면 돼.
목적지는 데스밸리의 '유레카 샌드듄(Eureka Dunes)'. 비포장도로에 제법 험난한 코스라 만발의 준비가 필요한 곳이다.
캠핑 장비를 장만하러 들린 가게에서 주인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나, 여기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그날밤 이후로 그는 부쩍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에게 돈을 내밀었다. 그는 슬그머니 돈을 받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날, 차로 2시간 반을 넘게 달려 데스밸리에 도착했다.
그 자체가 커다란 국립공원인 그곳에는 수많은 관광명소가 있었다. 유레카 샌드듄으로 가는 도중, 다른 인간들이 가는 곳이나 근사해 보이는 곳이 나올 때마다 주인은 우리도 가보자고 졸랐으나, 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마침내 유레카 듄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세워두고 기본적인 장비만 챙겨 모래 언덕을 걸어갔다. 보이는 건 푸른 하늘과 황색 모래, 검은 그림자뿐. 가파른 경사에 주인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탐사가 목적이 아니므로 대충 적당한 곳을 골라 가림막을 치고 앉았다. 유달리 이른 이곳의 일몰시간 덕분에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하나가 끝나간다.
황금빛으로 타들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주인이 물었다.
"별이 뜨면 넌 다시 램프로 돌아가는 거야?"
"어."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다른 소원을 빌어도 돼?"
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 멀리, 모래 언덕과 하늘이 맞닿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우웅. 유레카 듄의 특징인 노래하는 모래가 낮은 목소리로 울었다.
"... 두 번째 소원이야. 별이 질 때까지.. 진실만을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