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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12)

by Outis

금빛으로 물든 지평선.

이름이 엘로디라던 금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 당신 파트너는 전형적인 거짓말쟁이예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소원이야."


지니가 말없이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사그라드는 태양을 등지고 선 그의 머리에 얇은 황금색 환이 씌워졌다. 내 위로 그의 그림자가 내리고, 나는 밤보다 일찍 찾아온 어둠 속에 잠겼다.


"별이 질 때까지.."


무심코 말하고서 순간 후회가 되었다. 하룻밤은 너무 짧은가. 조금만 더 길게 잡을 걸 그랬나.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해.


"진실만을 말해줘."


지니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의 소원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가짜 왕관이 모래 속으로 잠겨 들고, 군림자를 잃은 하늘이 검푸르게 변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나의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졌다.


"넌 얼마나 오랫동안 램프에 갇혀 있었지?"


"대략 2천 년 정도입니다."


지니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존댓말. 나는 입술을 살짝 우그러뜨렸다.


"... 그동안 몇 명의 주인을 만났어?"


"세어 보지 않아서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대충이라도 괜찮아."


"이삼백은 족히 넘을 겁니다."


"이전 주인들은 어땠어?"


"하나같이 인간 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인간 같은 인간이란 게 뭐야?"


"변덕스럽고 욕심은 많은 주제에 무능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 자체가 너무 한심한지라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족속이요. 부자가 밉다 외치던 자는 돈을, 타인의 능력을 깎아내리던 자는 그와 같은 능력을, 아름다움을 증오하던 자는 미모를 원했죠. 싫다고 떠든 것은 가질 수 없기 때문. 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자기모순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 우습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죽고 싶다 하신 것은 원하시는 모습의 삶을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요?"


정확히 노린 듯하면서도 어딘가 엇갈려 있는 대답.


"...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가슴이 답답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다. 이런 내 눈에도, 이런 내 마음에도. 순수하게 아름답다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별의 바다에 눈길을 사로잡힌 채,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꺼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 사실이야?"


"인간의 터무니없는 믿음입니다."


"하하, 가차 없네. 낭만도 없고."


"진실을 말하라 명하셔서 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피식. 왠지 날 탓하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꽉 막힌 것 마냥 답답했던 마음 한 구석이 아주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


"제 소관이 아니라서 모릅니다."


"죽으면 먼저 죽은 사람이랑 만날 수 있어?"


"그 또한 모릅니다."


"영혼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환생이니. 결국 다 거짓말인 건가..."


"... 별로 상관없지 않습니까?"


나는 지니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길어야 백 년 남짓인 유한한 목숨. 바람 한 줄기에 허망하게 스러질 유약한 존재. 저처럼 무한을 사는 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들의 일생은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찰나 동안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산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잃든, 무한의 시점에선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네 말은..."


"인간 주제에 틀려봤자 별 큰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하."


입이 벌어지고, 가슴에 바람이 들어온다.


저런 재수 없는 말이 뭐가 재밌다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너무 웃었더니 눈물까지 찔끔 나온다. 정작 저 자식은 웃지도 않는구만. 혼자 뻘쭘하다 싶어서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하아... 그래. 너한테는 진짜 인간이 하찮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세가 되었어? 절대 원해서는 아닐 거고."


"... 죄의 대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2천 년 동안?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인간의 자유의지와 목숨에 손을 댔습니다."


자유의지와 목숨. 처음 만났을 때 지니가 자기는 못 건드린다 했던 것들이다.


지니의 시선이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무슨 사연인지 자세히 물어보려다가 그걸 보고 그만두었다.

무한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어디 한둘이겠나. 나와 관계없는 일이기도 하고.

내 문제나 신경 쓰자.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남은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나 이전 주인들은 어떻게 되었지?"


"전부 죽었습니다."


"네가 죽였어?"


"그렇습니다."


"... 나도 죽일 거지?"


"그럴 생각입니다."


"뭐야. 그럼 처음부터 그냥 죽였으면 될걸."


"소원의 대가라는 균형과, 인간의 탐욕이라는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도 없이 살인을 했다간 램프에 속박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날 부추겼구나. 죽이고 싶어서."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한 제 미학이기도 합니다. 최고의 환희에서 최고의 절망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죠."


"악취미."


"그런 즐거움도 없이 그 많은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하긴. 서비스업이 스트레스가 많지."


후우. 어림도 없이 하늘에 입김을 불어 보지만, 닿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런 좋은 것도 보여줬는데, 마지막 소원은 잘 생각해서 빌어야겠다. 널 위해서."


"그거 감사하네요. 아직 시간 많으니 천천히 생각하세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솔직히 뭐든 상관없다는 말투. 어쩐지 안심이 된다.


"근데 계속 그 자세로 앉아 있을 셈이야? 존댓말도 그렇고.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원래대로 하자."


지니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우우웅. 우리는 잠자코 모래의 노래를 들었다.

별자리라든가 그런 것 좀 배워둘걸. 예쁘긴 한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조급함에 입을 열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남의 소중한 걸 빼앗았다고 했던 거, 기억해?"


딱히 이 녀석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는데.

죽으려는 건 원하는 모습의 삶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냐는 그 말에, 조금은 변명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의도하지 않아도, 숨만 쉬고 있어도 불행을 가져오는 인간이 있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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