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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17)

by Outis

"불이야!"


나시르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은 물을 담은 그릇이나 물주머니, 젖은 나뭇가지 등을 챙겨갔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여 맹렬히 타오르는 불을 마주했을 때는 아무도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나시르와 미리암의 아들 무스타파가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으나, 그 또한 불 앞에서 멈칫했다. 잠시 후 저 뒤에서 배가 산만큼 나온 무스타파의 아내가 헉헉대며 걸어왔다.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가쁜 숨을 삼켰다. 화마는 흡사 분노에 찬 지옥의 용처럼 몸을 꿈틀대며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혹 저 불속으로 남편이 뛰어들어갈까 걱정이 되어 그녀가 무스타파의 팔을 꼭 붙잡았다.


"아이고! 이를 어째."


"이미 늦었어. 저런 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


마을 사람들 모두 손을 놓고서 그저 불이 저절로 꺼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무스타파는 털썩 땅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에구, 불쌍해서 어쩌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그들은 이웃의 죽음과 유가족의 슬픔을 애도하는 한편, 끔찍한 불행이 자신들을 비껴간 것에 내심 안도했다.


노쇠한 아버지와 함께 촌장이 제일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탁.. 탁.. 장로의 지팡이 소리를 듣고 마을 주민들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파티마가 떠나자마자, 이렇게 됐구먼, 그래..."


장로가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파티마 때문이라고? 아니, 파티마가 없어서 그렇다잖아. 그럼 나시르네가 벌을 받은 것인가? 아니지, 그냥 보호받던 게 없어진 거 아냐?


그때, 누군가 외쳤다.


"저기! 안에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일제히 나시르의 집 쪽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불속에서 꼿꼿이 선 인영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진짜 사람이야?"


"그럴 리가! 사람이 어떻게 저 안에서 견뎌. 무슨 기둥 같은 거 아냐?"


"어, 어? 움직인다!"


"설마.. 아버지?"


마치 걸어 나오는 것처럼 그림자가 일렁이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무스타파의 가슴속에도 일망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인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마침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눈을 감고 걸어 나왔다. 불 한가운데서 머리카락 한 올 그을리지 않고 멀쩡히 살아 나온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이럴 수가.. 진짜 사람이잖아."


"세상에! 정녕 사람인가?"


남자의 기적 같은 등장과 아리따운 미모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부모가 살아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무스타파까지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가장 놀란 사람은 장로였다. 힘없이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뜨고서, 장로는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주름진 그의 입술이 웅얼웅얼 어떤 이름을 불렀다.


"잔, 잔 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잔? 잔이라면 장로가 늘 얘기하던 오아시스 전설에 나오는 정령의 이름이 아닌가.


"정령이라고?"


"그래서 불속에서도 멀쩡했던 거구나."


"어쩐지! 사람이라기엔 너무 아름답다 했지."


모든 시선과 궁금증을 한 몸에 받으며 잔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막 태어난 별처럼 밝은 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이웃 사람 둘을 삼킨 불에서 정령이 나타난 이유는 전혀 생각지 않고서, 너무 단순하게도 그들은 정령의 방문이 길한 징조라 믿어버렸다. 누군가는 그를 추앙하는 기도를 올렸고, 누군가는 그에게 복을 달라 빌었으며, 누군가는 잃어버린 이를 돌려달라 애원했다.


"어째서, 사막에 계셔야 하는 잔 님이, 우리 마을에..?"


오직 늙은 장로만이 유일하게 의문을 품었다. 예리한 사고력 덕분이라기 보단, 긍정회로 같은 건 세월의 풍파에 진작 닳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심하고, 의심하고, 근심하는 자가 오래 살아남는 법.

문득 장로의 가슴속에 꽁꽁 똬리를 틀고 있던 의구심이 쉬익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나시르 이놈이!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불나방같이 알아서 제 죽을 자리로 몰려들었구나. 일이 수월하겠어."


잔이 마을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사람들은 귀를 의심하며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장로는 콧김을 내뿜으며,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소리를 질렀다.


"도마앙! 쳐라아!"


"방관. 그게 너희의 죄목이다."


잔한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몸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그는 단말마를 지르며 타들어갔다.


하나.


엉거주춤, 뭉그적거리던 사람들은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열심히 도망쳐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젠 위치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둘, 셋, 넷, 다섯.

열, 스물, 서른, 마흔. 쓰러지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사방이 아비규환. 달아나려는 방향마다 비명횡사가 이어지는 바람에, 무스타파와 그의 아내는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순간 잔의 눈이 자신을 향한 걸 눈치챈 무스타파가 아내의 어깨를 꼭 안았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내와 아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냉랭한 잔의 시선이 비장한 무스타파의 눈동자에서 겁먹은 그의 아내의 얼굴로 옮겨지고, 그녀의 배에서 멈추었다. 그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다.


"방조에 가까운 방관, 그리고 죄의 유전."


화르륵. 발끝부터 머리까지, 두 사람의 몸이 불타올랐다.


"으아악!"


"꺄아악!"


비명을 내지를 수 있었던 단 몇 초 남짓의 시간이 그나마 그들의 마지막에서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으아앙!"


마을 곳곳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중에는 파티마와 사이좋게 지내던 애들도 있었다. 일단 어른들부터 태워 죽이던 잔은 무스타파의 아이를 죽인 시점에서 망설임을 버렸다.


"무지(無知), 그것은 변명이 아닌 또 다른 죄의 이름... 너희도 결국은 같은 죄를 세습하겠지."


끔찍한 비명. 살 타는 냄새. 마을이 멸망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장로가 흐느꼈다.

아들인 촌장은 진작 혼자 도망치다가 불에 타 죽고, 장로는 아무렇게나 쌓아둔 옷가지 마냥 버려져 있었다.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을 눈물이 굽이굽이 흘러 뚝, 뚝, 보잘것없는 흔적으로 스러졌다.


"왜 이러십니까. 당신 같은 분이 대체 왜..."


한 번 살려준 목숨. 잔은 장로를 알아보았지만, 어떤 인사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를 불태워 죽였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물론 잔은 그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모래가 높은 파도같이 일어나 두터운 벽처럼 마을을 둘러쌌다. 그래도 나가보려고 모래벽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막혀오는 숨에 금방 후회했다. 다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은 질식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운 좋게 빠져나온 이들도 모래 구덩이에 파묻혀 절규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마을 외곽 여기저기서 자비를 구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잔은 공중으로 떠올라 그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네. 혹시라도 모래 속에서 살아남아 버리면 곤란하지. 내가 떠난 후에 천사 놈들이 와서 구해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는 사람들을 삼킨 모래를 공중으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부서진 마을 잔해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모래와 합쳤다. 잔이 푸른 화염으로 그것들을 녹이자, 붉고 끈적이는 액체가 생기더니 둥그렇게 뭉쳤다. 잔의 입김 한 번에 유동성을 띈 구체가 순식간에 냉각되었고, 투명한 유리공이 만들어졌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이 산산조각 났다. 수백 개의 날카로운 파편이 살았다 안도하는 사람들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끊일 줄 모르고 내리는 유리의 빗속에서, 사람들은 온몸이 찢기며 죽어갔다.


불과 피. 마을이 점점 붉은색으로 채워졌다.


"흐흐흠, 흠~"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잔은 파티마가 곧잘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의 마음 불길처럼 꺼질 줄을 모른다오. 사막에 핀 장미처럼 그대에게 미소 짓네."


이윽고 마을에 숨이 붙은 자가 하나도 안 남게 되었을 때.


"깊어 가는 나의 한숨 오늘 밤은 닿으려나. 애달픈 내 이 마음, 그대는 왜 알지 못해."


잔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어리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프구나 나의 사랑. 혼자라도 이어가리. 사막의 꽃 아데니움. 눈물의 꽃 아데니움."


툭. 눈물이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첫 번째 죄의 완성이었다.


"... 잡히기 전에 가야 해. 빨리 돌아가서 너를, 너에게 전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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