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신음을 흘리며 파티마가 눈을 떴다. 날카로운 송곳이 관자놀이를 푹 찌르는 것 같은 두통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어지럽고 속이 뒤집혀왔다. 이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며 파티마는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반짝반짝. 거울처럼 맑은 물에 반사된 햇빛이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물..? 오아시스? 분명 사막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는데?'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맹렬히 쏟아지던 햇빛의 뜨거움, 메마른 숨과 단내, 피로를 호소하는 다리, 그리고.
- 여기서 잠시 멈추지.
남편의 목소리.
'그이! 그이는?'
파티마는 남편인 아사드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내가 일사병으로 쓰러져서 남편이 여기로 데려왔나? 그이는 어디 있지?'
열심히 눈을 굴리며 찾아보았으나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파티마는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아이같이 울상을 지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왜, 울어. 흑... 주책맞게."
밑도 끝도 없이 슬픔이 몰려들었다. 급기야 그 큰 눈에 다 담아둘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차올라서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잠깐 어디 갔겠지. 금방 올 거야. 울보 여편네라 밉보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만 울어."
"네 남편은 안 와."
웬 남자의 목소리. 분명 아까까지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부여잡고, 파티마는 소리가 난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부풀어 오른 시야 속에 한 남자가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게 낯선 남자가 나타나 놀란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파티마는 얼른 눈물을 짜내고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자세의 변화를 견디기엔 아직 무리인 몸이 휘청거렸다. 파티마의 몸이 흔들리는 걸 보고 남자의 손이 움찔,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가쁜 숨을 고르며 파티마가 물었다.
"누구세요?"
"......"
남자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서 말없이 파티마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왠지 슬퍼 보인다는 생각에 파티마는 살짝 긴장을 내려놓았다가, 방금 남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선 다시금 마음의 날을 세웠다.
"누구신데 우리 남편이 안 온다 하십니까?"
"... 보면 몰라?"
남자가 씩 웃었다. 부드러운 입술 곡선이 한쪽으로 기울고, 가늘어진 눈 위에서 미간이 주름을 잡았다. 얼핏 보기에 그는 파티마를 비웃고 있는 듯했으나, 그의 눈은 시간이 채 지우지 못한 흔적을 찾으려 파티마의 얼굴을 애달프게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의 정체 따위보다 남편의 행방이 더 궁금한 속마음을 읽은 남자는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난 이 사막의 악령이다."
"뭐라고요?"
파티마는 숨을 삼켰다. 악령이 남편을 알고 있고,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한다? 그럼 남편은 어떻게 된 거지?
"우리 남편, 지금 어디 있어요?"
"... 이제 없어. 내가 죽였거든."
종이에 번진 먹물처럼 파티마의 동공이 커지고,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얕은 숨이 가늘게 늘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절대 믿을 수 없어.
두고 봐. 조금만 있으면 남편이 돌아와서, 저 헛소리를 지껄이는 미치광이를 쫓아낼 테니.
절박한 그녀의 바람은 남자가 툭 던진 칼 한 자루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은 피가 묻은 아사드의 칼이었다.
"난 이 사막의 구울, 내가 네 남편을 잡아먹었다."
지진이라도 났나. 파티마의 눈앞이 흔들렸다. 동요하는 그녀를 아랑곳 않고 남자는 잔인한 소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네 부모,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다 먹어 치웠지.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그래, 네 초라한 어미와 너와 함께 어울리던 마을 아이들, 보기보다 맛이 괜찮더군?"
"흐, 으으..!"
보잘것없는 절규를 쏟으며 파티마가 앞으로 쓰러졌다. 오장육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 끓어오르는 분노가 목구멍에서 턱 막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두 손 가득 모래를 움켜쥐고서, 소리가 되지 못한 뜨거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파티마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악령을 노려보았다. 뿌득, 부서져라 앙다문 이빨이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크게 만족한 악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날 미워해. 증오해라! 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나에 대한 분노를 새겨 둬. 절대 잊히지 않도록, 곱씹고 또 곱씹는 거다."
악령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재밌군. 너만은 살려주지. 네 남편의 낙타와 물건을 가지고 당장 여기서 떠나라. 이쪽으로 쉬지 않고 가면 두 식경(대략 1시간 정도)쯤 후에 이동 중인 카라반 일행과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들을 따라 멀리,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꼭 살아서..."
'살아서', 이 말에 감정이 복받친 그는 잠시 말을 쉬었다.
사락. 파티마의 손 안에서 작은 모래 언덕이 무너져 내리며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 같다, 그녀는 생각했다.
운명은 엇갈린 두 톱니바퀴가 맞물릴 틈을 주지 않았다. 손가락부터 손, 팔목, 팔. 악령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음을, 이제 정말 끝임을 깨달은 그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살아서, 나한테 복수하러 와.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악령은 파티마의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설픈 연기로는 숨기지 못한 슬픔을 남기고서.
영원히.
"으윽!"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잔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보려 했으나, 잔은 바로 주저앉았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사방에서 환하게 비쳐오는 빛이 괴로운 기억을 끊임없이 들춰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천계. 정오의 태양이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듯이, 그 어떤 죄도 숨길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게 내 미리 경고했거늘. 결국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천사 라미엘을 향해 잔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얼굴에 비스듬한 자조가 어렸다. 한때 추앙받던 정령의 꼴사나운 몰락. 그토록 싫어하는 천사 앞에 무릎 꿇은 이 비참함.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모아 잔이 비아냥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만?"
"네 죄는 네가 제일 잘 알 것이다."
찬란한 천계의 빛이 잔의 어두운 행적을 비추었다. 자신의 손에 죽어간 인간들의 끔찍한 최후와 비명이 떠올라 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운 기억은 그래도 물러갈 줄을 모르고,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 문신같이 그의 온몸에 새겨졌다. 존재하는 한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도록.
잔이 눈을 부릅뜨고 라미엘을 노려보았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당신도 알고 계시잖아요?"
경멸이라는 괴수가 할퀴고 간 생채기, 그 생채기에서 배어 나온 피처럼 진득한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지들끼리 물고 뜯고 죽이는, 더러운 생쥐만도 못한 것들입니다! 당신들이 침묵하시기에 내가 죽였습니다. 그게 죄입니까?"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일지라도 위대하신 우리 창조주의 자식이니라."
"하! 그럼 더더욱 가만 두시면 안 되지요! 혼쭐을 내서 잘못이란 걸 알려주셔야지요!"
"그들은 이미 그분께서 친히 주신 말씀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대로 살지 않잖아요! 지침서 하나 던져 주면 그걸로 끝입니까?"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는 것이야. 그분은 끝의 끝의 끝까지 인내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시니."
"그것들이 언제 뉘우치는데요? 죽기 전에? 그동안 지은 죄는, 그들에게 해를 입은 이들의 억울함은요?"
"모두 다 풀어주시니라. 억울함도, 업보도. 네 모자란 지견(智見)으로 감히 헤아리려 들지 마라."
이번엔 라미엘이 근엄한 표정으로 잔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죄가 없는 자들까지 죽였느냐?"
"그들이라고 죄가 없습니까?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지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말이냐?"
"그것도 결국 지 아비, 그 아비의 아비처럼 죄인이 될 것입니다."
"네 오만함이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너는 감히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자들을 네 멋대로 단죄하고, 그들에게 내리신 기회를 앗아갔다. 그 죄가 어찌 가볍다 하겠느냐."
쿵. 라미엘의 잔잔한 분노와 잔의 업보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으윽..."
"너는 네 어쭙잖은 기준으로 인간 목숨의 가치를 정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을 농락하였다."
"... 농락?"
"파티마란 아이의 감정을 조종한 것, 그것이 농락이 아니고 무엇이냐?"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잔이 대들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한 최선이었어!"
"그래서, 살았느냐?"
"그건... 그래서 살렸잖아요. 지금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고통과 분노의 지옥 속에서 말이냐?"
라미엘이 지그시 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긍정과 부정이 첨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파티마를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다고."
"넌 단지 잊히고 싶지 않은 이기심으로 그 애의 마음에 증오를 심은 거다."
"아니야..."
"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러 놓고, 그 애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며 그 애 탓으로 돌렸다."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생각만 한 게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거늘."
"아니야!"
잔이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그래도 막을 수 없는 빛 속에서 충격으로 일그러진 파티마의 얼굴이 일렁였다.
"그래서 살았잖아... 증오만큼 강한 동기가 어딨어! 다 그녀를 위한 거야..."
"... 아아, 참으로 자애로우신 분. 너 같은 놈에게도 기회를 주시다니."
라미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펼치자, 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점차 모양을 잡아갔고, 램프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잔의 양 손목에 두꺼운 황금빛 족쇄가 채워졌다.
"?!"
"인간에게 지은 죄는 인간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법. 너는 앞으로 이 램프에 구속되어, 램프를 손에 넣은 자를 주인으로 모시며 그의 소원을 세 가지 들어주어라. 네가 지은 죄, 즉 살인, 사랑, 부활을 제외한 네 권능의 행사를 허락하마."
가증스러운 인간을 뭐, 주인으로 모시라고? 잔은 불복종의 의사를 표하기 위해 일어났다가, 족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다시 고꾸라졌다.
"으윽!"
"아주 조금씩이겠지만, 네 주인의 감사하는 마음이 네 업보를 덜어낼 것이다. 그렇게 덕을 쌓다 보면 언젠가 너도 램프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질 거야. 반대로 계속 죄를 짓는다면 업보는 가중될 것이고, 너의 권능도 사라진다. 그럼 너는 램프에 영원히 갇히게 되겠지."
"...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종노릇을 하라고? 차라리 지금 죽여!"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어쩌면 주인이 소원으로 네 자유를 빌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장난해? 세상에 어떤 인간이 그 짓을 하겠어..? 아,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끅끅끅. 잔이 손가락으로 라미엘을 가리키며 웃었다.
"날 사냥개로 이용하려는 거구나? 솔직히 용서해 주고 싶지 않은 죄인들을 내 손을 빌려 없애시려고. 그러면서 '자비롭고 자애롭고 인내하시는' 당신들은 깨끗한 손을 유지하시려고 말이야. 좋아, 기꺼이 당신들 뜻대로 해주지!"
어리석은 놈. 끝까지 알아듣지를 못하는구나. 라미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램프로 빨려 들어가면서 잔이 소리쳤다.
"당신 뜻대로, 죽어 마땅한 놈들을 제 손으로 죽여드리리다! 당신을 위해서! 아하하하하하하!"
원망과 조롱의 비웃음과 함께 잔은 램프에 삼켜졌다. 그 램프를 내려다보며 라미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위대하신 창조주시여, 어찌 이런 놈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시나이까..."
사박. 사박. 악령이 가리킨 방향으로 낙타를 몰고 가면서, 파티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 잊어선 안돼. 그 얼굴, 그 목소리. 절대로, 잊어선..."
휘이잉. 따가운 모래를 몰고 온 바람이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를 쓸고 갔다.